당부의 말씀
이 일기를 읽고 이 일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길 바랍니다. 마치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고 읽지 않은 것인 양 시치미 떼고 있어주십시오.
일기의 내용은 쓴 사람의 책임이지만, 일기를 읽는 것은 읽는 사람의 책임이라고 주장합니다. 아무도 이 일기를 읽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걸으며 산을 봤는데, 그다지 색이 바뀌지 않았다. 아직 가을은 멀었나하고 생각하는데, 은행나무의 잎이 노랗게 변한 것을 알아챘다.
그렇게 소리도 없이 가을이 오나보다.
사진이 필요해서 사진관에 갔다 왔다. 사진을 부탁하고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핀 데이지(daisy)를 보았다. 가늘고 긴 하얀 꽃잎이 가지런히 나온 것을 보니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안쪽의 꽃술 부분의 노란색이 흰색과 참 잘 어울렸다. 길가에 핀 데이지, 꽤 오랜만에 본다.
데이지,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 느낌이 다르다. 사실 느낌만 다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본 것은 데이지가 아니었다. 이제야 정말 데이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빛이 비추어졌다고 할까.
관조(觀照)라는 말이 있다. 흔히들 "관조적"이라는 말을 쓰면서, 사심(邪心) 없이 객관적으로, 초월적인 입장을 뜻하는 말로 쓴다. 예를 들면, "관조적인 태도로 그들의 싸움을 바라 보았다."
하지만 관조의 더 바른 뜻은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불교(佛敎)에서 왔다. 불교에서는 이 말을,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봄"으로 설명한다.
관(觀): 보다
조(照): 비추다
다시 말해,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어두운 방안에서 알지 못하는 어떤 사물을 보려고 한다고 하자. 도대체 어두워서 그 사물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볼 수/알 수 없다. 사족이지만, 많은 언어에서 본다는 것은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빛을 비추어야한다. 사물을 보는 것은 이렇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에도 "밝게 비춤"이 필요하다. 다만 여기에서 비추는 것은 빛이 아니라 "지혜"이다. 어두운 방에서 불을 켜듯, 무명(無明)에서 지혜를 비추는 것이다.
어두운 광야를 살펴 보기 위해 달빛이 필요할 것처럼, 우리의 삶을 제대로 보기 위해 큰 지혜가 필요하다.
불교에서 관조를 이야기 하며 쓰는 지혜는 지금 하려는 말보다 더 근원적이고, 원대한 것이긴 하지만, 데이지를 보는 시각의 변화에 관조라는 말을 써보고 싶다. 지금까지 본 데이지는 진정 데이지가 아니었다. 이제야 마음을 알게 되었고, 마음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데이지를 본다. 사모(思慕)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 혹시 사랑이라고 부를 그 마음이, 이제서야 데이지를 비춘다.
데이지를 보고 있으니, 청초(淸楚)한 느낌이 들었다. 단아(端雅)한 느낌도 들었다.
장미를 보고 키가 크고 화장을 짙게한 중년의 아름다운 여인을 떠올린다면, 데이지를 보았을 때엔 막 스물이 넘은 아무런 단장을 하지 않아도 막연히 예쁜 아가씨를 떠올릴까.
데이지, 귀여운 느낌도 든다. 커다란 꽃송이가 피어 멀리에서도 보이는 장미가 있는가하면, 길가에 자그마하게 피어 그것을 발견했을 때에 조그만한 기쁨으로 다가오는 그런, 작은 꽃송이의 데이지...
데이지, 슬픈 느낌도 든다. 가시가 있는 검붉은 장미는 거친 가지를 갖고 있지만, 데이지는 작은 한 포기, 여린 줄기 뿐이다.
세상엔 많은 꽃이 있다. 장미도 있고, 데이지도 있고... 호박꽃도 있고, 봉숭아꽃도 있다. 안개꽃도 있고, 목련도 있고, 벚꽃도 있고. 그리고 데이지를 좋아한다.
너는 데이지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도 데이지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좋아한다, 데이지를 좋아하며 그리운 마음을 삭여보는 지금 여기 이 존재를.
맑은 하늘 구름 한점을 보아도 눈물을 흘리는, 초라하지만 애틋한, 그리고 언젠가 허무하게 늙어버릴 23년 10개월된 이 청춘에게 찬사(讚辭)를...
작성자: vergence
imyaman@bekrag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