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그런 것 같더라. 글 보니까, 난 문자 보낸 적 없는데 문자를 주고 받았다는 거야...
이런 말은 너무나 결정적인 것이라 놓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차라리 이런 말은 듣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이미 A에 대해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 A인지, 어떻게 A인지,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애초부터.
그 녀석의 실수는 실로 심각한 것이다. 진정 건드리지 말고 지나쳤어야 할...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 아직 여전하다. 그 녀석은 애써 문제를 만든다. 어찌해야할까.
그건 그 문제고, 중요한 것은 현재 그 녀석이 문제를 만들었다는 것. 하지만 잊을 수 있다. 잊게 만들어져 있고, 잊고 싶다. 그리고 잊는다한들 그 과정의 기간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허망함으로 그 공백을 채우면 되지 않을까.
이미 그 정도는 버텨낼 수 있는 정도의 심리적인 강건함을 지니고 있다.
의지(意志)를 통해서 초월(超越)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의지(意志)이기 때문에.
그 녀석이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로 묻어 두었어야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그건 그렇고, 그간 일기에도 여러번 등장했다. 실명으로 쓴 것도 있고, 이후에는 A에 통합되었고.
그랬다. 참 많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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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대전역까지요."
조금 있다가,
"저 술 냄새 많이 나요?"
"아니요. 별로 안 나는데요."
"아, 그래요."
"왜요?"
"부모님께 술 마신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서요. 술 냄새 풍기고 들어가고 싶지도 않고."
"나이 어떻게 되길래..."
"음, 이제 졸업하니까..."
"그럼 술 마셔도 뭐라고 하지 않겠네."
"그건 그렇죠. 그런데 별로 그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네요."
또 조금 있다가,
"집이 대전역 근처예요?"
"아니요. 조금 더 가야하는데, 걸어가면서 술 좀 깨려고요."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기뻤다. 비록 멀리 있지만, 그 마음 알고 있고, 믿고 있으니까. 그렇다. 흔들릴 필요도 없다. 단지 조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택시 기자에게 나이를 물었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말하기로는 38세라고 했다. 혼인 했는지, 자녀 있는지 등에 대해 얘기 했다. 그리고 훌쩍 서른 중반이 되어 일도 익숙하게 되고 혼인도 하고 아이도 낳은 모습으로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이런 저런 얘기를 해줬다.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욕심 부리면서 늦게 혼인하고, 늦게 아이 낳는 것보다는 조금 일찍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를 해줬다. 차라리 조금 일찍하고, 관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얘기를 해줬다. 사실 여기까지는 단지 한명의 사람이 하는 이야기이고, 인간의 삶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도 아닌터라 가볍게 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입에서 "안정"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안정에서 오히려 삶이 더 행복해질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일찍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안정이라는 것에 대해, 그 친구를 떠 올렸다. 그렇다, 지금(요 얼마전부터) 안정을 얻고 있다, 그 사람으로부터. 고맙다.
대전역에서 택시를 내렸다. 역 근처에는 으레 그렇지만, 사창가가 있다. 밤이 늦으면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나와서 호객 행위를 한다. 전에도 여러번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럴 때엔 보통 무시하고 지나간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호객 행위하는 아주머니, "놀다 가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여자친구 있어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서 스스로 좀 놀랐다. 그래 여자친구가 있지. 기다려야지.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연속 3일동안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났다. 외롭고 허전한 마음에 집에 있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도 하고 저런 얘기도 하고, 그래도... 슬펐다. 자꾸 생각이 나서.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그 허전함은 마치 껍데기만 남은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길게 하면 거짓말이 많아진다던가.
요 얼마부터 블로그에 쓴 글의 말투가 바뀌었다. 단순히 나에 대한 독백(獨白)의 말투가 아니고, 너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말투가 되었다.
블로그의 이름을 바꿀까 생각 중이야. "daily life of vergence"에서 "고백(告白)" 정도로... 고하다(말하다)는 의미의 고(告), 사뢰다(말하다)는 의미의 백(白). "고한다"와 "사뢰다"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 너에게 하는 한마디 한마디 모두 소중하고 조심스러우니까. 당연한 것이겠지만, 고백의 내용이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이기 때문이겠지.
말투가 바뀐 것만큼 나에게 전체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아. 근래만큼 많이 느낀 적이 없는 것 같다. 사실, 근래만큼 많이 "흐느낀" 적이 없는 것 같다라고 해야할까.
전에는 글을 쓸 때에 나의 생각을 조리(條理)있게 표현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는데, 지금은 감정의 표현이 더 많은 것 같다. 아마도 너를 의식(意識)하고 있어서이겠지?
네가 보든 안 보든, 전하고 싶다, 이런 느낌과 생각 모두를. 말이라는 것이 엉성해서 모두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너는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하니까, 짧은 한마디로도 전달이 될 것 같아.
새로운 - 아마도 새로운 것이겠지. 우선 논리적으로 같은 것은 없는 데다가, 너라는 유일한 대상에 대한 느낌은 당연히 새로운 것일테니 - 느낌들을 통해서 문학, 예술에 대한 이해가 확장된 것 같아. 십년 가까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근래에 새롭게 들리고, 그 의미도 풍성하게 느껴져. 소설이나 시에서 느꼈던 것을이 단순히 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어느 가요의 가사에도 이런 비슷한게 나왔던 것 같은데... 너를 좋아하게 되니, 모든 사랑 노래가 내 얘기 같다고.
산에가서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야기에서 나오는 사악한 인물들의 심정이 이해되었어. 음, 어떤 예(例)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소설을 잘 안 읽어서 마땅히 들 예가 없네. 영화에서는 아나킨 스카이워커(Anakin Walker)가 다쓰 베이더(Darth Vader)가 된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다 부서지고, 세상 모든 생물이 죽는다고 해도, 너를 포기할 수 없는 그런 마음. 그것이 조금만 방향을 잘 못 잡아도 큰 일이 나겠지. 왜냐하면 너를 갈구(渴求)하는 마음이 굉장히 강할테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와 나를 빼고, 세상 모든 인간을 죽인다면 나는 너를 완전히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무섭지? 물론 단 둘이 남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 정도로 너를 향한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
꿈을 꾸었는데, 이건 정말 무섭네. 자살을 하려고 해. 그리고 유서에 이렇게 썼어. 내 시체를 박제(剝製)로 만들어서 너에게 보내달라고. 그러면 네가 조금 덜 외롭지 않을까. 헌데, 싸늘해서 좀 힘들겠지?
생각이 많다.
뭐냐, 나는?
돌아가는 기차의 창에 비친 모습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대답할 수 없다. 다만 사람 형상을 한 무엇이 앞에 있다.
참 오랜동안 물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외로웠던 탓이었나봐. 도저히 외로워서 나를 찾고 싶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노력할 수록, 다양한 시도를 할 수록 더 공허했어. 상처를 계속 후펴 파는 것보다 더.
이제 이런 물음에 조금은 초연하다. 전에는 외로워서 이런 물음이 절박(切迫)했어. 이제는 외로움이 덜해. 네가 있으니까. 너에게 귀의(歸依)한다. 이 작은 존재(存在)로.
'나'라는 것에 대한 물음에,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형이상학적인 생각도 해보고, 시간과 관련해서 생각도 해보고 민족과 문화와 관련해서도 생각해보고 가족과 관련해서도 생각해보고 윤리와 관련해서도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조금은 헛된 것이 아니었나 싶어.
진작에 '너'와 관련해서 '나'에 대해 생각해 봤어야했던 것인데.
말을 하고 싶다, "좋아한다"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싶어서, 내가 느끼는 것을 충분히 전달하고 싶어서 글을 계속 써. 그런데, 이 빌어먹을 놈의 말이라는 것이 도대체 성기어서 아무리 표현을 해도 모자라. 어쩌면 "좋아한다"라는 말로 너무 너무 부족해서 "사랑한다"라는 말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 때때로 사람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마구 써서 무슨 의미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말이야. "좋아한다"는 말이 진짜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 써볼게.
말은 한 없이 부족한 것이지만, 그래도 말을 하면 너는 느낄 수 있겠지? 내가 "종아한다"라고 딱 한 마디만 말하더라도, 내가 느끼는 기쁨, 즐거움, 애절함, 애틋함, 아쉬움, 두려움... 그런 것 모두를 너도 느낄 수 있겠지? 혹은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 풍부하게 너는 느낄까?
CD player의 리모콘을 들고, 전원을 켜고(power on), 재생(play) 버튼을 누르면, CD가 돌아가고 그 안에서는 이런 저런 복잡한 부품들이 작동을 하고 소리가 나. 너에게 전화를 걸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네 머리 속에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생각들이 터져 나오고 곧 네 심장이 뛰고 그리고 내가 느끼는 것을 너도 느끼겠지. 꼭 마술 주문 같다. "열려라, 참깨"하면 문이 열리는 것처럼.
말, 말로 다 표현 못하더라도 너는 나를 느낄 수 있겠지. 쓰고 보니 가림이 없고, 언뜻 보면 천박하게 느껴질 것 같아. 조금 걱정되네. 부디 솔직하고 투명하다고 생각해줘.
기다림, 그것을 좋아한다.
애틋한 마음이 있으면, 기다림이 더욱 뿌듯할까?
내 기다림의 시작
작사 : 이헌숙
작곡 : 김종서
편곡 : 최준성
아직도 그댄 내게 끝없는 기다림
밤을 기다리다 밤들면 아침을 기다리듯
많은 세월이 지난 창가엔 그댈 닮은 바람이
지쳐가는 나를 위로하듯이
메마른 입술을 어루만져주네
내 오랜 기다림 헛 돼도
기다림만으로 사랑이라면
그 마지막 잊으려던 눈물도
내 기다림의 시작일뿐야
05:30에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잠이 든 것 같다. 도대체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다.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왜 이렇게 느끼고 있는가?
잠 못 들어 뒤척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나도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나도 인간인가.
07:20 정도에 일어났다. 눈이 안 떠졌다. 피곤했다. 그런데 정신은 맑았다. 잠 들기 전에 있던 그 많은 슬픈 감정, 그것과 연결된 생각들이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일어나서 이리 저리 서성거렸는데, 도통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한 상태였다. 역시 인간 같지 않아. 아무래도 우주 외계인일거야.
우주 외계인이니까 그런 감정은 느끼지 않겠지. 오직 냉철한 사고만 갖고 있을 수는 없을까? 참 오랫동안 그렇게 바라고 있던 것이잖아. 오직 이성이 지배적이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기를 바라면서 살아왔지. 그리고 감정은 이성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면 족했어.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상황이야. 도대체 뭘 느끼고 있는거야?
자려고 누웠는데, 눈물이 나와. 전혀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이런게 어떻게 계속 유지 돼? 그것도 몇시간 동안. 그리고 눈물이 나게 되는 감정도 모르겠어. 슬픈거야? 서러운거야? 도대체 뭐야?
아무튼 눈물이 났다.
슬픔이라면, 엄청나게 큰 바윗덩어리 같은 슬픔이 내 몸 위에 올려져 있는 것 같아.
서러움이라면, 음식에 곰팡이가 퍼진 것마냥 마음 위에 서러움이 허옇게 덮여 있는 것 같아.
아침에 일어나 고요한 마음이었는데, 글 쓰다보니 또 눈물이 난다. 이해 안 된다. 부정(否定).
떠났다. "떠났다"와 "떠난다"는 다르다는 것을 남기고.
알 수 없다.
19:58. 천천히...
기억하기로, 김동섭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 중의 한 분이다.
2000년 3월에 찾아가 뵈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이 물었다, "여자 친구 사귀었니? 내가 생각하기엔, 너는 여자친구 있으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공부하는데에 도움이 될 거야."
혹시 선생님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나의 학교 생활을 지켜보면서. 불안, 나는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계속 되었고, 지금도 여전하다.
헤어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불안보다 무섭다.
떠나가 버렸네 (김현식)
그대 내 맘에서 떠나가 버렸네 사랑을 남긴 채
그대 내 맘에서 떠나가 버렸네 아쉬움 남긴 채
외로운 이내 마음에 사랑을 남긴 채
떠나가 버렸네 내 맘속에 그대는
떠나가 버렸네 사랑했던 그대는
...
내 마음 깊은 그곳에 사랑을 남긴 채
blogging 하는 친구들이, 내 글은 도대체가 무거워서 당최 트랙백을 보낼 수 없다고 하더라. 그리고 근래 naokis.org에 자주 들르고 있어. 그런 탓인지 그 쪽에서 쓰는 말투를 조금 따라해 봤어. 하지만 아무래도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습니다요. OTL
그냥 하던 대로 할래. 아무도 이해 못하는 단어 나열의 글이나 계속 써 올려야겠어.
아싸, 조쿠나! ヽ(*+∀ +*)ノ
아무튼 이 글은 좀 장난에 가깝다.
오호라 그렇지. 바로 이런 것이었어. 내일 만나면 점심 때 고등어 구이를 먹을테니, 한번 시도해봐야겠다. 고등어 구이는 반쪽을 갈라서 나온다. 그래서 가운데 굵은 가시가 그대로 들어있으니, 일일이 골라내어서 줘 보자. 어떻게 느낄까?
사실 난 그런게 싫어. 심지어 "챙겨 준다"라는 말의 어감도 싫어. "챙긴다"도 아니고, 챙겨 "주는" 것은 또 뭐야. "챙긴다"는 말도 누구를 위해 해준다는 뜻이 들어있는데, 거기에 "주다"까지. 으윽... 자율성, 주체성, 스스로 따위의 말을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상종 못할 단어인거야.
게다가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지,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구차하다는 생각이 마구 든단 말이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좀 더 신경을 쓰고 싶고, 마음이 가고, 도와주고 싶고, 뭐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해. 그래도 챙겨 준다는 것은 왠지 싫어. 꼭 어린애를 돌보거나 하는 느낌이잖아. 많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겠지만, 아무래도 내 생각은 그래.
그래도 생생한 경험담이니까 조금 참고를 해야겠다. 그리고 내일 좀 써먹어 볼까?
자, 다음 머리를 쓰다듬는 것. 어이쿠, 이건 좀 어려울 것 같아. 본문에도 나오듯이 아무나 쓰다듬는 것은 싫다고 했으니... 잘 못 했다간 아주 큰일 나겠지. 멀리서 온 손님인데, 기분 나쁘게 해서 보낼 수는 없는 것 아냐. 조금 안전하게...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다정하게"인데... 어쩐다? 난 다정과는 거리가 멀잖아. 마치 사촌의 사돈의 팔촌의 할아버지의 친구의 동생 정도랄까... 뭐 그래도 한번 '척'이라도 해보자. 다정한 척.
언제였더라, 성격 심리학 시간에 배운 것 같아. 한국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성의 이미지: "가슴이 따뜻한 남자". 아마도 커피 광고의 영향이겠지. 그런데, 따뜻함 하면 나도 뒤지지 않는데.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것도 좀 어려울 것 같아. 친구들한테 평을 듣기로 "겉으로 쌀쌀한 녀석"이잖아, 나는. 아아, 젠장할. 역시 나는 여자친구 사귀기 사이에는 부석사 108 계단만큼의 애로사항이 있는거야.
어떻게든 "안으로는 따뜻한 남자"임을 드러내야해. 시내에서 만나면 괜히 구걸하는 사람 앞에서 슬픈 표정으로 돈을 좀 주고, 길에서 주는 전단지에 조금이라도 감상적인 문구가 있으면 많이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는 거야. 음, 그런데 쓰고 나니 완전학습 유치 뽕짝 보쌈이네. OTL
이 글은 사실 좀 더 긴 시간 동안 정밀한 고찰이 필요할텐데, 갑자기 내키는 마음이 생겨 짧게 써보려한다.
존재에 대한 고찰은 근본적으로 (오직) 시간과 연결지어 행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현상학이나 실존주의 철학에서 다루어진 논의들이 이 생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정확하게 어떻게 그렇다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존재에 대한 고찰을 형이상학적 측면, 사회/계급적 측면에서 보는 것은 이미 고려되었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시각이 또 필요하다고 본다. 아마도 존재를 시간과 관련해서 다룬 것은 하이데거가 이미 했지만, 지금 쓰는 이 글은 어떻게든 내 생각이다.
존재를 사회/(민족 - 문화, 연대감, 공동체 등)의 측면에서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써보려한다. 우선은 시간에 대해서.
(다른 용어를 쓸 수도 있겠는데, 머리 속에서 지금 떠오르는 단어는 이것이다) 경험의 장(場)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살고 있는 이 공간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공간은 하나의 연속된 공간이다. 경험하는 이 공간은 3차원이다. 그리고 경험에 비추어볼 때에, 연속되어있다. 컴퓨터 게임처럼 눈을 감았다 뜨면 불연속적인 공간이 나타나는 일은 있지 않다. 마치 영화 Matrix에서 문을 열고 나가면 전혀 다른 공간으로 가게 되는 일이, 경험 상의 현실에서는 없다. 아마도 이것은 경험의 부족/한계/제약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을 완전 불변한 진리로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경험할 가능성이 적은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우주 저편에 불연속된 공간대(帶)가 있다고 하더라도 경험할 가능성이 적으니 유효하지 않다. 미래에 그런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면, 지금 이 생각은 바뀌어야할 것이다.
공간에 질료가 존재하고, 질료가 존재하여 공간이다. 질료가 변화한다. 공간도 변화한다. 질료가 변화하는 것과 공간이 변화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이러한 변화는 오직 시간 내에서 가능하다. 시간에 대해 미분을 가정해보자. 찰나적인 시간 동안의 공간과 질료를 보자. 그것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스냅샷을 찍어 놓은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변화는 오직 시간과 관련이 있다. 변화의 대상은 공간과 질료이고, 공간과 질료는 하나이다. 그래서 결국 남는 것은 시간과 변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때때로 존재에 대해 고려할 때에, 그리고 존재를 구성하는 것을 가정할 때엔, 공간을 시간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축(軸)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존재를 질료의 독립적인 무더기로 볼 수 있다. 이 때에만 공간과 시간에 관련지어 존재를 - 다시 말해 질료를 -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의 예는, 같은 존재가 여럿 있을 수 있는가를 살펴볼 때이다. 어느 질료도 같은 시간/공간에 여럿이 존재할 수 없다. 있다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귀신이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겹쳐 있는 상황이 가능할 것이다.
나중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 가능하다면 대학원에서.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그런데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야 순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도 나를 좋아하길 바란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 부정되어야한다.
나는 숨을 쉰다. 그리고 살아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도리(道理)를 져버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생명이다. 나는 살아있다. 하지만 죽어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나'라는 단어를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나'만이 떠오른다.
지금 왜 나는 '나'를 찾는가?
나는 나를 잊고 싶다. 나는 너에게 의존하고 싶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네가 원한다면 영혼이라도 포기하겠다.
나는 너에게 귀의(歸依)하고 싶다. 마치 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 신에게 귀의(歸依)하는 것처럼.
나는 나를 모두 잃고 싶다. 나로 꽉 차여 있는 이 몸뚱이와 정신을 모두 비워내고, 너로 채우고 싶다.
'나'라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나의 사고를 모두 흩어버리고 '너'라는 것으로 쌓아 놓고 싶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싶다. 더 좋아하고 싶다. 나는 네가 좋아졌다.
나는 나를 분리하고 싶다. 나를 좋아하는 부분과 나를 싫어하는 부분으로 나누고 싶다. 혹은 내가 좋아하고 싶은 부분과 내가 싫어하고 싶은 부분으로 나누고 싶다. 싫어하는 부분/싫어하고 싶은 부분을 '너'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또 좋아하고 싶다.
나는 나를 '너'라고 부르고/생각하고/느끼고 싶다. 이것은 나라는 것의 한계를 확장하고 전체로서 하나인 큰 의미의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더 부여잡고 있을 수 없다. 작은 의미의 '나'로 퇴보(退步)하고 그리고 안식(安息)을 취(取)하고 싶다. 그리고 '나'에 작은 의미의 '너'를 붙이고 싶다.
A를 만났다/만난다. 변했다/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않는 것처럼 느낀다. 이미 충분히 익숙해졌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변하더라도, 현재 어떻게 변하고 있어도 익숙하다.
좋아했다는 것은 현재 좋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A를 좋아했다. 그리고 A를 좋아한다.
A와 이야기를 했다.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A의 말을 들었다. A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는 대화를 했다. 하지만 '우리'라면 그것은 '나'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나'는 '너'를 분리(分離)할 수 없다.
술을 마셨다. 행동/사고의 결과를 보니, 정신이 몽롱해졌나보다. 하지만 여전히 사고(思考)하고 있고, 논리(論理)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술로 인해 양(量)적으로, 질(質)적으로 사고가 저급(低級)해졌을 지라도 감정(感情)은 더욱 풍부하다.
표현(表現)하고 싶다. 수용(受容)하고 싶다. 운동(運動)하고 싶다. 감각(感覺)하고 싶다.
A의 손을 생각한다. 손을 잡고, 보듬고, 느끼고 싶다. A를 안고 싶다. A와 성교(性交)하고 싶다. A에 대해 성적환상(性的幻想)을 한다.
그러면서 나를 더욱 잃고 싶다. 존재(存在)를 잊고 싶다.
집에 돌아와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는데 눈물이 나왔다. 서러웠다. 그렇다, 나는 좋아한다. 하지만 왜 이리 괴로운가?
서러워서 울었다. 욕실에서 울었다.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봐 세탁기 문을 열고 그 안에 얼굴을 들이밀고 울었다. 도대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의 성(性)이란 무엇인가(단지 남녀의 차이, 성별(性別)에서 오는 성적인 욕구의 성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本性)의 의미에서 말이다)? 유학, 성리학을 접하면서 이 질문에 대해 여러가지 견해(見解)를 접(接)했다. 그리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좀 더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앎은 더욱 혼란스럽다. 어째서 인간의 성(本性)에 대한 논의(論議)는 남녀의 성 또한 다루고 있는가? 아마도 남녀의 성이 인간의 성의 근본적인 부분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것에 대해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서럽다.
알고 싶었다/싶다. 하지만 알게 되는 것에 대한 결과를 알고 싶지는 않았다/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된다.
그렇게 되는 것을 알았다면, 알고 싶었어도 알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다. 지금, 알면서도 한다.
쓴 글을 다시 보면서, 생각을 한다/하지 않는다. 지울까? 남길까?
산을 오르는 길에 안용식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나를 못 알아본 듯이 지나쳐 갔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이 많이 가리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 후줄근한 바지와 볼품 없는 웃옷, 가방에 매달린 떨그럭 거리는 컵.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그런 것에 태연한 자연스러운 느낌이 와 닿았다.
몇발짝 앞에서 선생님인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 그 자리에 멈추었다. 히지만 선생님은 계속 걸었다. 나는 뒷모습을 보았고, 그 잠시 동안 많은 갈등을 했다. 선생님을 부를까, 부르면 뭐라고 인사를 할까, 무슨 이야기를 할까, 당연히 반기겠지, 머리가 많이 자라서 지저분한데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지금 나의 상황이 더 초라하지 않나... 결국 초초히 걸어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꺾어진 길 모퉁이에서 놓쳐버렸다.
그 많은 생각 중에,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나에 대한 부끄러움, 현재 나의 모습. 나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나? 나태하지 않은가. 나는 언제나 부지런하고 싶다. 몸을 자꾸 다그쳐서 무엇이라도 얼른 이루어 놓고 싶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안용식 선생님이 해준 말이 기억난다. 나를 죽여야 내가 산다.
이 말을 들은 중학교 3학년 때,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큰 힘이 된 말이다. 때때로 그리고 필요할 때에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고, 상황에 맞게 적용되었다. 지금은 이 말이, 나의 욕구를 자제하고, 노력할 때에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죽을만큼 노력하면 당연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당연히 해야할, 마땅한 생각이 아닌 것을 했다. 증오하고 싶었고, 분노하고 싶었고, 파괴하고 싶었고, 괴롭히고 싶었다. 기대에 실망으로 답하고 싶었다.
중학교 3학년 때에, 외국어 고등학교에 지원해보라는 선생님의 권유를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어린 나이의 나에게, 타인에게 할 수 있는 일종의 공격적인 행동은 그런 것이었다. 기대에 실망으로 답하는 것.
시간이 지나, 지금은 미안함을 느낀다. 그런 생각은 "자연히" 할 생각에 속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지 말아야할 생각들이었다.
근래 나의 공부가 많이 더디다. 게으른 탓이다. 상당히 위기감을 느낀다. 이렇게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나, 모두 지나버리면 어떡하지, 아직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다. 자랑스럽게 지금의 나는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별로 그렇지 못하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아마도 나이가 30이 넘으면. 하지만 마음은 조급하다.
공부에 게으름을 피우면서, 점점 향락(享樂)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퇴폐(頹廢)적이거나 소모(消耗)적인 향락은 아니고).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여유(餘裕)를 즐기고 있다. 그 여유는 사실, 여유가 아니고 나태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무엇을 하든, 어떻게 되든 시간은 갈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괴로움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자연과 가까이에서 소요(逍遙)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나태함으로 이끈다.
약간의 충격이 있다. 근래에 나태함을 모두 날리고 부지런해져야겠다. 노력하겠다. 나중에 선생님을 다시 마주치게 되면, 주저하지 않도록.
안용식 선생님을 그렇게 스쳐간 것이 못내 아쉽다.
기억이 난다.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연합 고사. 겨울이 가까워져 난로를 땠다. 그 때에도 대전 중학교는 한참 조개탄을 때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이 자리를 바꾸라고 했다. 나는 맨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세번째 줄로 가라는 것이었다. 난로 바로 옆자리라서 많이 더웠다. 알고 봤더니 진학에 대해 상의하려고 어머니와 담임 선생님인 안용식 선생님이 만났는데, 어머니께서 내가 추위를 많이 타서 걱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바로 그 말에 선생님이 자리를 바꾸어 준 것이다. 물론, 한 학생에게 그런 배려를 한다는 것은 공평에서 벗어난다고 볼 수 있지만, 이미 자리 배정은 불공평한 것이었다.
또, 안용식 선생님은 스스로 청소를 했다. 내가 맨 앞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교탁이나 앞문 가까이에 있었다(다른 첫번째 줄에 앉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점심을 먹고 공부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비를 들고 교실 이곳 저곳을 청소 했다. 내 자리의 바로 앞이나, 문 옆도. 선생님이 청소 하는 것이 보기 불편해서 내가 하겠다고 말씀드리면, 공부하는데 집중하라고 하셨다. 그 때 선생님에게서 참 따뜻함을 느꼈다. 뿐만아니라 다른 선생에게서 느껴지는 권위나 딱딱한 느낌도 없었다. 나는 그 느낌을 기억한다.
산에서 선생님을 그대로 보내면서, 갑자기 철이와 메텔이 헤어질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 그 것을 보았을 때의 느낌도. '아마 이런 것이었을까'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스쳐버리면, 이내 서로의 기억 속에서는 더욱 멀어지겠지. 지금 잠시 붙잡아 짧게라도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의 허무함에서 기억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둘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 만났을 때에 느낄 낯선 느낌은 더욱 커지겠지.
시간의 흐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기억, 존재의 사라짐. 그런 것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부디 멀지 않은 날에, 즐겁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명절 날이어서 음식을 이것저것 차렸다. 어떤 명절인지는 모르겠다. 날이 춥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설은 아닌 것 같다. 여름 옷 차림은 아니고 아마도 추석 정도 되지 않을까 지금 추측한다.
엄마가 어떤 아주머니에게 밥을 차려 주라고 했다. 영 내키지 않는데 밥을 차려 줬다. 그 장소는 버스 정류장이었다. 학교에 가기위해 130번 버스를 타는 정류장. 그리고 나의 집은 문창동의 그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음식을 차리는데, 실제로는 먼 그 거리가 무시되었다. 내가 뚝딱 밥을 차려 주었다, 이상하게도 땅 바닥에. 아주머니가 밥을 먹었다, 조금 천천히. 그러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나는 내심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있었다. 딱히 뭐가 싫다는 것은 아니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마련한 음식 중에는 물김치가 있었다. 실생활에서, 어제 엄마가 만든 물김치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물김치가 담긴 병도 같았다. 앵두 술을 담아 놓을 법한 조금 투박한 유리 병과 빨간 플라스틱 마게. 약간 붉은 색의 김칫국물.
그렇게 버스를 기다렸는데, 버스가 지나갔다, 아마도 두번. 아마도 내가 기다리던 버스는 130번 같다. 엄마는 다른 버스를 타고 간 것 같다. 혹은 엄마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지 않은 것 같다.
아주머니가 버스를 타고 갔다. 그리고 밥 먹은 것들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정류장 옆의, 충무 체육관 쪽으로 난 길으로 몇 걸음 갔다가 돌아오니 그릇과 음식이 없었다. 무엇을 하려고 걸어갔는지 모르겠다. 정류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사라졌고, 대신 낯선 아가씨가 있었다. 아가씨에게 묻자, 아가씨가 그 것들을 자기가 갖고 있다고 했다. 그리곤 정류장에서 그 집, 실생활에서 정류장에서 충무 체육관 쪽으로 난 길에서 왼쪽에 감나무가 있는 집, 앞에 엄청나게 많은 짐 안에서 그릇과 그 김치병을 꺼냈다. 꺼내는 와중에 김치가 담긴 병의 뚜껑이 살짝 열려 국물이 주륵 새었다. 그 아가씨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헌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아주머니가 이미 갔고, 그 아주머니가 아가씨에게 맏기었을 리가 없는데, 왜 당연히 그 아주머니가 맏겼을 것이라고 믿었을까? 전혀 그 아가씨를 의심하지 않았다.
많은 짐들을 보아 대단히 부유한 것 같았다. 그 아가씨가 그릇과 음식을 꺼내기 위해 꺼낸 첫번째 박스는, 명절음식이라고 쓰여 있던 것 같다. 그 아가씨가 많은 짐들을 가지고, 아마도 그 감나무 집에 이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릇과 음식을 챙기고 이사 하는 것 도와줄지 물었다. 그 아가씨가 대단히 좋아했는데, 내 마음은 조금 갈등을 하고 있었다. 예쁜 아가씨라 마음이 설레이기도 하는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많은 짐을 옮기는 이사에 아가씨 혼자 일을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일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오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이 뒷부분의 느낌은 상당히 강하고 뚜렸했다. 그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다. 또 마음은 도와주고 같이 있고 싶었는데, 정말 강하게 그랬는데, 한편으로는 망설였다. 혹시 시간 낭비, 노력 낭비 하는 것은 아닐까. 대충 꿈의 내용은 이렇다.
이 꿈에서 "욕구 충족"이 나타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다분히 실생활에서의 사건들이 꿈에서 변형되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 같다.
어제 저녁에 국수를 먹었다. 엄마가 만든 그 물김치에 국수를 말아서 먹었는데, 그 김치가 꿈에 나왔다. 하지만 그 김치에 대한 별다른 인상은 없다.
아가씨는 아마도 그 사람이 아닐까 싶다. 전화를 여러번 했는데, 받지 않아서 아쉬운 감정이 남아있었던 탓에 꿈에 나타난 것 같기도 하고, 요 얼마간 나의 주의를 많이 끌고 있는 사람인 탓이기도 한 것 같다.
그리고 마음에 두고 있다는 점이 비슷한 점이다. 부유해 보인다는 것은 내가 자주 하는 농담이 꿈에 표현된 것이 아닐까 싶다. 전화 요금이 20여 만원 나왔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도 썼다는 생각을 하고, 속으로 농담삼아, '훗, 갑부...'라고 했는데, 그것이 꿈에 나타난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망설임도 이 꿈에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이유는 좀 다르게 표현되어있지만.
조금 아쉬운 점은, 꿈에서 결론이 없다. 그 아가씨를 도와주고 함께 있을 것인지, 지나쳐 버릴 것인지 결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본다면 실생활에서의 결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꿈속에서 잘 된다면, 실생활에서도 잘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개연성이 있는가는 둘째로 치고.
뒷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 꿈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생각들이 어떤 것인지 한번 정리할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조금 더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립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고, 대출했다. 전에 다 읽지 못했던 존재와 시간을 다시 빌리고, 전부터 마음만 갖고 있었던 성리학에 대한 책을 한권 더 빌렸다. 제목은 "한국의 사상가 10인 - 퇴계 이황"
전부터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전에 시도했던 책 이후에 다른 것을 시도하지 않고 있었다. 근래 늘어가는 "우리"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다시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통과 문화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그를 읽으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전에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 받은 서신에서, 앞 부분에 인사를 하는 부분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열두 살 때 숙부 우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제자는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경해야한다"는 말에 이르러 척연히 스스로 경계하여, "사람의 자식된 도리로서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있었다.
하루는 '리理'자를 가지고 송재에게 묻기를 "무릇 일의 옳은 것이 이치입니까?"하니, 송재는 기뻐하면서 "너는 이미 글 뜻을 이해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목이 메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서로 예를 갖추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동경을 하고 있나보다, 아무래도 나는.
철학, 사상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내가 순수한 진흙과 같다는 느낌이 든다. 책을 읽다보면 그것들을 이해한다. 그것들을 굳이 외우지 않지만, 그래서 체계적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책을 읽고 나서 돌아보면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순수한 진흙과 같은 느낌은, 그 질료로 어떤 형상이 단단히 굳어진 것이 아니지만 질료 자체가 점점 변하여 어느 상황에서든 맞아 들어가는 융통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종합적인 내용이나 단 몇줄의 국지적인 내용이거나 간에 나의 생각이 이미 그것에 맞아 들어있고 더 부합하게 변화하고, 그 이후에는 오히려 그것들을 잊고 나의 생각이 되려 체계적으로 되어감을 느낀다. (아마도 느낌뿐이겠지만)
더위로 인해 정신이 없다. 컴퓨터를 켜면 더위에 죽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켜고 있다. 컴퓨터를 켰음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하지 않는다. 이상하다.
전에 대충 귀끔을 주었던 터이지만, 어제 갑자기 이은진님이 백업을 해달라고 했다. 밤에 양파님이 디스크 초기화하고 운영제체 다시 설치할 것이라고 했다. 사용자들에게 미리 알리지도 못하고, 졸지에 서버 설정을 다시 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새로 설치한 서버에 접속해보니, 깔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파님이 좋아하는 XFS 파일 시스템, 40기가에 하나의 파티션, 하나의 파일 시스템을 만들고 /에 마운트 했다. 역시 양파님. 하하.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DB 쪽을 제외하고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bekrage 서버의 상황에서는. 대신 DB 백업을 자주 해야겠다.
gentoo의 패키지 시스템을 들여다보면서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BSD의 패키지 시스템과 비슷해보인다.
한편으로는 BSD의 좋은 점이 GNU/Linux에게 도용당한 느낌이 든다. BSD 사용자들의 자랑이면서 자존심이었던 멋진 패키지 시스템이 이제 단지 BSD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SCO가 승소해서 GNU/Linux의 행보를 좀 꺾어 주면 좋으련만.
점심 때 즈음해서 한 차례 소나기가 왔다. 굵은 빗줄기가 내리니까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그다지 많은 양이 온 것은 아니라서 비가 그치고 더 더웠다.
지금 또 비가 온다. 저녁 때가 되어서인지 햇빛도 수그러들었고 비는 한결 더 세차다. 바람도 아까보다 훨씬 많이 불고. 무엇보다, 시원하다.
근래 날이 덥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 같다. 무엇가 해야한다/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데, 막상 뭘해야할 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일기도 그렇다. 오늘은 도데체 뭐라도 써야 되겠다는 생각에 apache 설치하는 도중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이 줄어든 것 같다. 현상학(한정숙 저)을 읽고 있는데, 읽고는 있지만 머리속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일기를 쓰려해도 생각이 없다. 깊이 생각하고 들여다보고, 비추어보는 활동이 없어진 것 같다.
두려운 느낌이 든다. 홀로 뒤쳐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의 침전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은 흘러 흘러, 계속 해서 흐르고 있는데, 부단히 흔들어 위로 떠올라 계속해서 흘러가는 와중에 벗어나 버린 것은 아닐까? 점점 가라 앉아 커다란 바위 앞에 놓여 그 위에 또 다른 침전물이 쌓여 결국 그 곳에 무디게 멈추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