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래도 기억하겠지, 이렇게 글을 쓰면/쓰면서.
나도 그렇다. 너로 인해 즐거워지고, 너로 인해 슬퍼지고. 나도 그렇다.
그리고 나는 이렇다. 어렵게 만나고, 어렵게 사귀는 이런 관계에 마냥 감사하고 싶다. "왜?"라는 물음으로 혼란스러워 하지 않고 싶고, 다만 "어떻게"라는 궁리로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 비록 나중에 헤어지더라도, 그래서 지금 기다림이 헛된 것이 되어도 원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울하고 기운이 없어 해보는 것이어도, 정말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이어도... 그런 말에도 좋아함, 미안함, 고마움, 두려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느껴지니까. 그런 것도 배려라면, 감사하겠다.
알게된 그 해부터 10월엔 언제나 들었다. 이번 10월 이제 이틀이 남았고, 한번도 듣지 않았다.
들을까, 말까.
10월에 느끼는 8월의 느낌. 그 날에 이 노래를 회상했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들어보자. 이제 하루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11월은 11월이니까.
When October goes
And when October goes
The snow begins to fly
Above the smokey roofs
I watch the planes go by
The children running home
Beneath a twilight sky
Oh, for the fun of them
When I was one of them
And when October goes
The same old dream appears
And you are in my arms
To share the happy years
I turn my head away
To hide the helpless tears
Oh how I hate to see October go
I should be over it now I know
It doesn't matter much
How old I grow
I hate to see October go
꿈을 꾸었는데, 꾸는 동안 꿈의 내용을 조직(組織, organising)했다. 꿈에서 깨고 기억하려고. 그런데 불행히도 깨고 나니 꿈의 마지막 부분만 빼고 다 지워졌다. 느끼기엔 꿈에서 깨는 기간은 단지 몇초인 것 같은데.
배경은, 어느 여자의 집/방.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나이는 나와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여자 귀신이 하나 있는데, TV에서 보는 처녀 귀신 같은 모습. 그런데, 유령 같은 귀신이 아니다. 형체가 있고 몸이 있는 귀신이다. 귀신이라고 하기 보다는 좀비(zombie)나 그런 것에 가까운 것 같다. 그리고 피를 빨려고 하는 것이 꼭 영화 속의 흡혈귀 같다.
기억나는, 꿈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여자가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고, 내가 같은 방에 있다. 무슨 짓을 했더니 여자 귀신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나오고 - 이것은 완전히 흡혈귀 영화와 비슷하다 - 내 사타구니를 향해 기어 온다. 엎드려서 두 팔로 기어오고 나는 바닥에 앉아 그 모습을 정면으로 보고 있다. 엄청나게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긴장해서 두 발로 여자 귀신을 밀어 낸다. 그리고 귀신은 내 성기(性器)를 물으려고 달려든다.
성기를 물어뜯는 것은 영화 드라큘라(게리 올드만이 나온 것)에서 나오는 생각과 같다.
꿈 전체를 보려고 하지 않아도 이 꿈은 성적 욕망과 관련된 것 같다. 이 꿈은 굳이 설명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통과...
병원에 가라고 한게 여러번이다. 나즈막히 권유하는 말만 했다.
어머니이거나 가족, 친척이기라도 하면 화를 내면서 명령도 해보겠지만, 그렇게는 못 한다.
여러 감정과 생각들이 떠 오르고, 여러번 다시 생각해 보지만, 결국 나오는 말은 병원에 가라는 권유 뿐이다. 염려하는 만큼을 다 표현하려면, 권유가 아니라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서 병원에 가라고 윽박질러야 맞겠지만,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지극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옆에 있다면, 어떻게든 구슬러서 손 잡고 함께 병원에 가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단지, 생각이 날 때면, 아프다는 생각만 머리 속을 한바퀴 휭 돌고 간다.
병원에 혼자 가는 것, 되게 싫다. 지금 이 나이가 되어도 병원은 가기 꺼려진다. '월요일 몇시에 병원에 가야지'하고 생각해 두면 결국 수요일 저녁 때 쯤에나 가게 되는...
혹시 방학 때에 아프면, 함께 병원에 가보는 것도 즐거운 데이트가 되지 않을까.
지극한 마음과 차마 하지 못 하는 마음. 지극한 마음과 어쩔 수 없이 하는 마음. 그것들 사이에서 갈등해야하는 것은 바로 '너'이기 때문.
전화가 왔다. 뭔가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리면서, 당첨됐단다. '오호...'
지긋이 버튼을 눌러, 끊어줬다. '훗...'
잠시 후, 또 왔다. 이번엔 어떤 아가씨. 목소리가 소프라노에 해당할까, 그냥 듣기에는 심각하게 부담됐다. 아까 온 전화를 얘기하며 무슨 경품을 받는다는 소리를 한다. 목소리만 들으면, 마치 엄청난 횡재를 당해 기뻐해야할 것 같은데, 말의 내용을 이해해 보려하니 자증이 밀려 온다.
고객님, 이번에 ... 어쩌고... 당첨이... 저쩌고, 그래서... 기타 등등...
음, 아가씨, 됐고요. 제가 돈 내야해요?
아, 예, 고객님... 어쩌구... 한달에 천원씩... 18개월... 그래서 만팔천원...
안 사요
그 쪽에서는 굳이 경품이라고 우기지만, 이 쪽의 논리는 이렇다.
돈을 낸다면, 경품이 아니다.
과연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간혹 당혹스럽게 이런 것을 새삼 느낀다. Objective-C 문법을 Perl에서 쓸 수 있다니...
멋지다. 헌데, 쓸 일이 있을까? 아마 많이 쓸 것 같다. Perl을 쓴 지 오래 되지 않았고, 아직 섬세한, 아름다운 코드를 작성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부족한 점이, 객체지향적으로 Perl을 사용하는 것인데, 시스템 관리와 작은 웹 사이트 정도에만 쓰다보니 더욱 그렇다. 그리고 아마 몇몇은 동의 하겠지만, 객체와 관련된 Perl의 문법은 익히기 귀찮다.
이미 Objective-C는 익숙하고, 그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Perl 코드를 작성할 수 있다니, 많은 노력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헌데... 써도 괜찮을까? 의심이 든다.
아무래도 Perl 고유의 문법을 좀 더 익혀야겠지?
scope의 문제가 좀 있다. self가 메쏘드(method) 정의 하는 부분에서는 전역변수로 보이지 않는 것과, 인스턴스 변수 선언해 놓은 것이 메쏘드 정의 하는 부분에서 인스턴스 변수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implementation Rect
{
$x; $y;
$width; $height;
}
+ new {
my $self;
$self = ~[$super new];
$x=0; $y=0;
$width=0; $height=0;
return $self;
}
이런 코드는 Objecitve-C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인데, 새로운 객체를 생성하기 위한 new라는 클래스 메쏘드를 오버라이드(override)해서 쓰는 것이다. 그런데, ObjectivePerl에서는 메쏘드 안에서 인스턴스의 변수에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x=0; ... $height=0; 이 부분에서 모두 에러가 발생한다.
그리고 $self는 Objective-C에서 self와 같은 것인데, 이것도 이미 정해진 변수이지만, 메쏘드 안에서 사용하기 위해 변수를 명시해 줘야한다.
우선, 확률의 답이라면 '이것이다'라고 답을 하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확률 문제가 아니라, 실제 삶의 문제라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머리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고 굴려보다, 입으로 내뱉어 봤다.
쏘지 않는다.
살아남을 확률을 최대로 높이기 위해서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논리적으로 - 단지 형식논리가 아니라 - , "행동한다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 것을 행동하는 것"도 포함하는 것이다. 상황에 대하여, 바로 그 특정한 상황에 맞게 임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사람으로 주어졌고 그들이 사는 얘기라면, 가장 옳은 답은 대화와 타협아닐까?
아무도 쏘지 않는 것과 모두 허공에 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딱 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 다시 말해 같은 범주의 개념은 아니지만 - 모두 허공에 쏘는 것은 소모적이고, 아무도 쏘지 않는 것은 조화(調和)롭다.
만약 3개의 로봇이 있고 그것들을 조종하여 서로 부수도록 하는 경우라면, 전원을 내리고 부수고 싶은 마음을 없애면 된다.
경도(硬度)가 다른 돌맹이가 부딪혀 어떤 것이 깨질 지 예측하는 경우라면, 자연히 깨지게 내버려두면 된다.
폭우가 쏟아져 강이 범람해 사람들이 떠 내려갈 상황이 되면, 그제서야 계산을 해서 답을 받으면 된다.
쓰고 보니,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로 보인다. 음, 이런 얘길 하려는게 아닌데.
꿈을 꾸었다. 꿈을 꾸고 기억한 것은 또 오랜만인가보다.
배경은 중학교이다. 장소는 내가 다닐 때의 대전중학교 3학년 12반 교실.
꿈 속에서의 나도 그 당시의 중학생인데, 조금 이상한 것은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것이다.
낮인데, 교실에 학생들이 앉아있다. 그리고 선생님이 무언가 지시를하고 있다.
우선 선생에 대해서. 꿈을 꾸면서 느낀 것은 확실히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깨어나고 보니 누구인지 기억 나지 않는다. 억압(repressioin)일까?
그 선생에 대한 느낌은, 자상하고, 친절하고, 필요할 때에 엄하고, 공정하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가진 선생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김동섭 선생, 그런데 김동섭 선생보다 얼굴 색이 밝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김병모 선생처럼. 그런데 김병모 선생은 공정하고, 필요할 때에 엄한 그런 느낌이 아닌데. 두 선생의 심상이 혼합된 것일까.
고등학교 때 선생이 아니라, 내 친구 중에 하나인 것 같기도 하다. 단지 키가 좀 큰 녀석인 것 같은데,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교실은 그 당시의 3학년 12반인데, 그 때의 담임 선생은 얼마전에 산에서 봤던 것 같은, 안용식 선생. 그런데, 그 느낌은 아니다.
누가 조퇴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선생이 하지 말라는 얘기를 한다. 이런 상황은 고등학교 때에 많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야간 자율 학습 안 하고 일찍 가겠다는 학생과 그게 무슨 이유냐는 선생, 바로 그 분위기였다.
이 부분은 깨고 나서 기억이 희미해졌다. 아무튼 짝이 일찍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면이 바뀐다. 어떤 장면이냐면, 외국에서 대단한 - 우리 또래의 - 아이가 와서 강연을 할 것이니 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점은, 운동장에 모이지 않고, 우리반의 책상과 걸상을 모두 치우고, 바닥에 학생들이 빽빽히 들어찬 것이다. 깨어나서 생각해보니, 같은 학년의 모든 학생이 우리 반으로 온 것은 아닌가보다. 왔다면 한 반에 모두 들어갈 리가 없다. 아무튼 그렇게 교실 바닥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위치는 복도 쪽이 아닌 창가. 대전중학교 본 건물은 ㄷ자 형의 건물이고 뚤린 쪽이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3학년 12반 교실은 북편에 있었고, 복도쪽 창가에서는 ㄷ자 안 쪽이 보였다. 교실의 칠판은 서쪽에 있었다. 복도는 교실의 오른쪽에 있었다. 복도쪽 창가 벽에 기대어 북쪽을 향하고 앉아 있었고, 짝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 친구는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을 봤는데, 놀랍게도, 그 강연한다는 아이가 앉아있었다. 여자 아이였고, 살색이 검었다. - 꿈 속에서 누가 설명해 준 내용이 없는데 - 그 아이는 인도에서 왔고, 같은 연령이다.
인사를 했다, 영어로. 그 당시의 내가 영어로 인사를 한다는 것이 터무니 없지만. 그리고 그 쪽에서 반갑게 받아줬다. 그리고 이야기를 몇마디 했는데, 렌즈가 있냐고 묻는다. 시력이 얼마나 되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머리 속에서 시력이라는 단어를 찾으려고 하는 동안, 짝이 먼저 물었다. 그런데, 사용한 단어가 무슨 "proof"였다. 꿈 속에서는 '아, 이 단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깨어나서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시력은 'view power'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 용어를 확실히 알고 있었는데, 왜 꿈 속에서는 찾지 못 했을까.
아무튼 그 아이가 끼고 있는 안경의 두께를 보고 시력이 많이 않 좋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비슷한 두께의 안경을 쓰는 친구 것을 빌려다 주려고 했다. 짝의 안경도 두꺼운데 그 정도는 안 된다. 그리고 짝과 함께 동시에 어떤 친구를 바라봤다. 그 녀석의 안경은 두꺼웠다. 그 녀석은 교실의 약간 오른쪽 중간에서 약간 뒤쪽에 있었다. 거의 교실 한 가운데에 있었다. 짝이 일찍 집에 갈 것이니 가면서 그 녀석에게 안경을 이 쪽으로 보내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짝이 갔다.
조금 이상한 것은 그 아이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왜 렌즈를 찾았을까. 안경이 낡아서 눈에 맞지 않았던 탓인가보다.
그리고 그 아이를 봤는데, 그냥 편한 느낌이 들었다. 옷깃이 접혀 있어 옷깃을 펴 주었다. 목에 손이 닿으면 그 아이가 깜짝 놀랄까봐 혹은 싫어할까봐 조심해서 옷깃을 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왔는데, 바뀐 것은 없어도, 도와주었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 아이가 연설을 한다. 영어로 하는데, 이해할 수 있다. 헌데, 다른 학생들은 이해를 못 하고 있다.
그 아이가 눈치를 챘다. 다른 학생들이 이해를 못 하자, 질문을 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질문을 했는 지도 알아듣지 못 한다.
그것도 눈치를 챈 그 아이가, 나에게 눈을 돌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대답을 했다. 우선 다른 학생들을 위해 질문을 한국어로 다시 설명하고, 영어로 대답하고, 다시 한국어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아이의 표정이 좋아졌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 연설을 들으며 필기를 하고 있다. 혹은 연설이 끝나고인지도 모르겠다. 필기한 내용은
A=B=C그리고 그 아이가, 필기 하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왼쪽 어깨 너머로 그것이 느껴졌다.
A: 1, 2. 없음. (뭐라고 썼는 지 정확히 기억 안 남)
B: 2, 허망분별(虛妄分別)
C: (뭐라고 썼는 지 기억 안 남)
그리고 깬 것 같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렇게 하면 이야기가 좀 맞아 들어갈지 모르겠다. 연설한 여자 아이는 A이다. 인도네시아와 관련지어야하지만,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 적고, 비슷한 이름의 인도로 대치된다. 그리고 인도는 불교와 관련이 있다. 인도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도는 사상이나 철학이 발전하였다. 그것은 연설을 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영어를 쓰는 것도 연결된다.
이렇게 하면 대충 연결지어지는 것 같은데, 궁금한 것은, 왜?
우선 이런 연결이 꿈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이런 배경으로 이런 이야기로 나왔을까?
어쩌면, 영어가 이 이야기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A와 전화 통화에서 영어로 이야기를 들으면 낯선 단어를 빼고, 내용은 이해가 된다. 내용은 좀 약하더라도 의도나 요구 같은 것들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완벽하게 이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영어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꿈에서는 영어로 듣고, 영어로 대답한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좀 더 확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A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이해한다는 식의 자만일 수 있다. 혹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A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어긋나 보이는 것이, 개방된, 여러 남성, 여성이 있는 상황이 아니고, 남자 중학교에 단 한명의 여자 아이라는 상황은 이런 추측과 맞지 않는다.
며칠 전에 길에서 지나가는 남자가 귀엽다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그것과 관련 짓는다면, 다른 남자가 관심을 갖더라도 오직 나만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역시, 자만이다.
혹은 영어로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한 소망 충족일 수 있다. 실제로는 영어로 유창한 대화를 하지 못한다. 하지만 꿈에서는 오히려 독점적으로 완전히 영어로 대화를 한다. 의식적으로는 영어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지만 - 그것보다는 한국어로 더 유창한 대화를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 무의식적으로는 영어 쪽에 쏠리고 있는 지 모른다.
그리고 저번에 TEPS 707점을 맞은 것에 대해 자만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친구들 중에 저 정도 점수를 받은 사람이 별로 없고 (영어영문학과, 외국 어학연수한 친구 제외하고), 친구들이 칭찬해 주니까 우쭐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연설하는 사람의 말을 혼자만 이해하고 대답까지 하는 것은, 다시 말해 특출함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혹은 단지 영어가 아니라, 의사소통에 대한 것일 지도 모른다. 전화를 통해 이야기 하고, 잘 못 들어서 다시 묻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해 되지 않을 때도 있는 것 같고.
A에 대해 내가 느끼는 것이 변형되어 연설하는 사람으로 나타났는 지도 모른다. "귀의"라는 말을 쓸 정도로 A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 심지어는 신(神)에 가까운 위치에 놓고 있다. 이것은 연설하는 사람으로 A가 등장한 것과 딱 맞는다. 남학교에서 생활하다보니, 사람이라고 하면 막연히 남자를 생각한다. 그리고 여자를 보더라도 남자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온통 남자만 있는 세상에 단 하나의 여자인 A가 있고, 이것은 남자 중학교에 나타난, 많은 남자 앞에 선 단 한명의 여자와 딱 맞아 떨어진다. 이런 해석이 맞다면, 왜 하필 중학교일까? 고등학교도 남자 고등학교였는데. 이것은 남자 고등학교에서 느끼는 위협 때문일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중학교에서는 임신이나 강간... 뭐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 했으니까.
추려보면,
다음으로, 선생에 대해서는 별로 떠 오르는 것이 없다.
짝에 대해서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3학년 때 짝은 정근택이었는데, 별로 맞지 않는다.
다른 것에 대해서도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 아마도 이 꿈은 A에 대한 꿈이었나보다.
신과 같이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근래에 융(Carl Gustav Jung)의 "인격과 전이"를 읽고 있는 탓인 것 같다. 이것은 곧 "정신적 팽창"과 관련이 있고, 다시 말해, 상대에 대한 관념을 마구 팽창시켜 신에 가깝게 만들고 나의 무의식적인 갈등을 그것에 기대어 보려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이 꿈은 그런 내용인 것 같다. 만약 이 내용이 맞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자만감은,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지 모르지만, 의식적으로는 아니니까 어찌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또, 의식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도 않고.
영어에 대한 자만감이 있다면, 그것은 좀 역기능적이다. 영어로 한마디도 말 하지 못 하면서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될테니.
더 좋은 의사 소통에 대한 소망이라면, 그래도 뭐 공부하고, 연습하는 것 밖에는...
신과 같이 느끼는 것은, 내적인 갈등을 계속해서 억압하고, 그것을 분출하기 위해 상대에게 -정확히는 상대에 대한 심상에 - 의지하기 보다는, 문제를 직접 파고 들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 때문에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쩌지? 그렇다면 스스로 갈등을 좀 더 해결하고, 더 건강한 방식으로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 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주장한 것처럼 - 고지식한 프로이트 학파(Freudian)은 아니지만 - 성(性)적인 욕구 또는 죽음에 대한 욕구가 이면(裏面)에 있을까? 더 깊이 알아 보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지나치게 솔직하게 까발려질 것 같으니까.
아무튼 오랜만에 꿈을 꾸고, 기억한 것 같다.,
If I discover within myself a desire which no experience in
this world can satisfy, the most probable explanation is that
I was made for another world
-C.S. Lewis (British scholar and novelist 1898-1963)-
만약 내가 나의 안에서 이 세상의 어떤 경험도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발견한다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내가 다른 새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자신 안에서 이 세상 어떤 경험으로도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다른 세상에 있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경험으로도 만족될 수 없는 욕망을 갖고 있다면,
다른 세상에 태어났어야 할 것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만족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은 없다.
만족은 외부 세계보다는 자신에 의한 것이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만족할 수 있다
이게 제일 간결하고 좋은 것 같다.
잘 못 해석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나보다.
여기서 c.s lewis 가 말하는 다른 세상이란.. 하나님의 세상.
이 세상 모든것들이 우리를 충만 시킬수없다면, 하나님께서 충만 시키실수있다.
무슨 이유인지 단지 흑과 백만 보이는 그런 그림, 사진이 좋다. 잘 찍은 컬러 사진도 일부러 채도(彩度, saturation)을 완전히 줄이고, 명암(明暗, brightness)를 조금 높이고, 대비(對比, contrast)를 조금 높이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무슨 이유일까...
로샤 테스트(Rorschach Test)에서는, 색에 대한 반응이 적은 것을, 정서를 외적으로 통제하고 정서의 억제가 많다고 설명한다. 또, 내향적이라고 설명한다.
음영에 대한 반응이 많은 것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설명하고, 상하기 쉬운 마음, 불안감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구체적으로 면밀히 살펴 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맞는 것 같다. 정서를 상당히 억압하며 살았고, 정서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노력한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다. 아마도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엊그제 형과 산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 원래 사진을 잘 찍지도 못하지만 날이 어두워질 때 쯤이어서 사진이 별로 좋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인화 안 해봤지만.
어두운 곳에서 사진을 찍으니 느낌이 다르다.
사실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게 어두웠다면 좋았을텐데. 무명(無明).
단지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이 있다면 좋겠다. 혹은 어두운 부분에서 밝은 부분으로 천천히 물들면 좋겠다.
사실 그것 보단 아무런 밝음이 없어서 아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정서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겠지.
분별을 없앤다는 것은 인식에 대해 아무런 견해,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닐텐데, 그래도 어두움을 바란다. 어두워서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밝아서 이것과 저것이 분명히 갈라져 보이지만, 그것들의 분별을 부정하고, 하나임을 느끼는 것이 바람직할테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눈을 감고 잠시 쉬자. 그리고 다시 보면, 훨씬 넓게 보이겠지.
형이 지금 쓰는 카메라를 팔고 디지털 카메라를 사자고 한다. 헌데, 두렵다. 과연 디지털 카메라...
산다면 디지털 카메라에는 손을 대지 말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디지털 카메라의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테니.
늘 그렇듯이 사회집단에는 하위체계가 존재하고, 그 하위체계에서 통하는 독특한 언어 사용이 있기 마련이다. "생리(生理)"라는 말을 쓰기를...
"너 방귀 뀌었어? 아우, 독하네." "생리 현상인데, 어쩔 수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젊은 과장이 부장을 차고 올라가나." "그런게 이 바닥 생리이지, 뭐."
"야, 생리 수업 들으러 안 가?" "가야지, 어? 늦었네. 자체 휴강..."
"여성의 생리 주기는 보통 한달이야. 3학년 수학선생님 알지? 코끼리 아줌마는 54일이야. 개인차가 있다는 얘기이지. 선생님이 말했다고 하지마라, 응? 교무실에서 뒈지게 맞는다." "오, 역시 코끼리 아줌마..."
생리라는 말은 이렇게 여러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러다 보니, 이것을 가지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성과 관련된 부분이 있어서, 잘 쓰면 억압으로 인한 긴장을 쏟아 낼 수 있는 건강한 농담이 되지만, 자칫 잘 못 쓰면 어색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대학에서 생물, 생리와 관련된 과목이 있는 학과에서는 이런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면서, 일반인에게 오해를 사기도 한다.
충남대학교 심리학과. 담당 교수가 워낙에 잘 나가는 데다가, 가르치기도 잘 가르치는 터라 생리 심리학은 충남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제일 빛나는 강의이다. 당연히 과제도 많이 부담된다. 교재 이름은 "생물 심리학", 강의 이름은 예전엔 생리 심리학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우리 때에는 "생물 심리학", "인지 신경 과학"이라고 한 것 같다. 그래도 다들 "생리 심리학"이라고 부른다.
덕분에 친구들과 생리 심리학 이야기를 하면 다른 학과 친구들이 듣고 조금 당황한다.
남학생: "생리 (심리학 과제) 했어?"
여학생: "응"
남학생: "오, 빨리 했네. 좀 보여줘."
여학생: "야, 내 것을 왜 너한테 보여주냐? 네가 직접 해."
다른 학과 친구들이 듣고 있으면, 여학생에게 생리했냐고 묻는 것에서부터 충격이 밀려 온다. 심지어는 남학생에게 직접 하라고까지.
헌데, 이런 것은 그냥 흔히 있고, 쉽게 익숙해 지니까 괜찮다.
한번은 이런 얘기를 버스 타고 가면서 한 적이 있다. 게다가 오해를 살만 했던게, 함게 이야기 하고 있던 여학우가 많이 어려 보였다. 아마도 그 때 나를 기분 나쁘게 쳐다봤던 그 아주머니는 청소년 성 매매범 따위로 생각하고 있었을테지.
아무튼 생리라는 말에서 월경이라는 뜻은 좀 빼면 좋겠다. 굳이 월경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생리라는 말을 함께 써서 혼란스럽게 할 필요가...
별 일 아니려니, 단지 조금 과부하 때문에 정지된 것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헌데, 오늘 아침에 서버의 로그를 살펴 보니, 의도적으로 손을 댄 흔적이 있다.
오늘 02:00 정도를 전후로 시간적으로 공백이 있다. 아무래도 그 때 즈음에 침입한 것 같고, 그 시간 대와 비슷하게 ftpd가 무참히 괴롭힘을 당한 흔적이 있다. 그리고 두어시간 지나서 패스워드 없는 계정이 있는지 일일이 검사한 흔적이 있는데, 주소를 보니 한국이다. 한국통신의 라인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쩌면 침입한 쪽에서 경유지로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피해 서버일 수도 있고. 아니면 관련 없는 또 다른 공격일 수도 있고.
동호회에 악용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없는 터라, 자료가 삭제되는 경우를 빼곤 큰 문제가 될 것 없다. 눈에 띄는 피해는 없고, 사용자들 자료도 문제 없는 것 같다. 혹시 백도어(back-door)를 만들어 두었을까 하고 찾아 봤는데, 보이지 않는다. 혹시 movable-type cgi를 악용해서 apache를 공격했을 리는 없을 것 같고...
별로 피해 입은 것도 없고, 걱정할만한 것은 없는데, 기분 나쁘다. 취약점이 뭐였을까.
사실 이것 저것 잠시 잠깐 살펴 보는데, 별로 손 대고 싶지 않다. 귀찮은 것인가...
아니면 위험한 정도가 높지 않아서, 무시하고 싶은 것일까. 위험한 정도가 높아야, 큰 위협이 되고, 그에 따라 공포/불안 같은 정서가 생기고, 그것에 집중하는 정도가 높아질텐데, 뭐 당해도 크게 문제 될 것 없으니...
시스템 관리자로서 이런 태도를 가지면 안 되는데... 조금 갈등이 있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올바른 것인가? 질문을 하여도 도대체 엉뚱한 것이어서 대답을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살긴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좋아하는 마음에 매일 매일 행복하고, 그래서 하는 일도 모두 잘 되면 좋으련만... 실제로는 좋아하는 마음이 오히려 미안하고, 그리고 하는 일도 별로고.
어떻게 해야하는 지 안다. 회피나 도피(회피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에 도망 가는 것, 도피는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도망쳐 있는 것)는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다시 말해, 과감히 잘라 내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유지하면서 그리고 더 생산적으로/창조적으로 진행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힘, 의지, 노력... 그런 것들.
그리고 그런 것을 위해 피요한 것은, 긍정적인 정서. 기쁨, 즐거움, 고마움, 자신감... 그런 것들.
자, 무던히 견뎌보자. 한 겨울의 바람을 맞으며, 차가움을 느끼고 따뜻함을 느끼고 결국엔 평온함을 느낀는 것처럼.
이런 것 저런 것 하다보면 바쁜 때가 있다. 그럴 때엔 잊곤 한다.
어제 아침 bekrage 서버에 접속하려고 보니 서버가 꺼져있었다. 전화 해서 서버 켜달라고 했다.
무슨 일인 지 알아보려 했는데, 귀찮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서버 좀 살피는데, 예전 서버도 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접속했다.
꼭, 폐허가 된 도시에 찾아가 추억이 담긴 물건을 찾았을 때의 느낌 같은 것.
개짐
명사(名辭, noun)
여성이 월경할 때 샅에 차는 물건. 주로 헝겊 따위로 만듦.
비슷한 말: 월경대, 생리대
그 외 통용되는 말: 코텍스(cortex), 패드(pad)
생리(生理)라는 말은 사실 많은 뜻이 있어서 월경(月經)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흔히 쓰이는 말이 생리인 것 같다. 아무튼, 월경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월경대(생리대)라는 말을 좀 어렸을 때 - 한참 성에 대해 호기심이 발동할, 중학교 때 - 배우게 되어서 그런지, 사용하기 힘든 말이다. 느낌이 좀... 어딘지 모르게 금기에 가깝다.
개짐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단어이고, 어디서 쓰인 것을 본 적도 없다. 헌데, 국어 사전에 실려 있다. 그리고 순 한국말인가보다, 한자 표기가 없는 것을 보니. 월경대, 개짐을 말할 기회가 있지 않아서 써 본 적은 없는데, 개짐이라는 말을 알게 된 후부터 월경대(생리대)라는 말보다는 개짐이라는 말을 쓰려고 하고 있다. 개짐이라는 말에 대해 이전에 갖고 있던 느낌(선입견)이 없어서 사용하기에 껄끄러운 것이 없다.
처음에 사진을 보고, '음, 요즘은 견용 개짐이 나왔나?'하고 생각했다. 글을 읽어보니, 아니다.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사진/글을 봐서 조금 놀랐다. 아무튼...
생각이 들었다, '선물로 사 줄까... 생일 선물로 저것도 함께 줄까...'
가격은 얼마일까, 크기는 어떻게 될까, 얼마나 오래 쓸 수 있을까, 똑딱단추(snap)가 살에 닿아서 차갑지는 않을까, 삶아도 괜찮을까, 그냥 빨아서는 피 잘 안 지워질텐데... 기숙사에 살면서 저런 것 빨래 하려면 좀 불편할테지... 쓰레기 문제 생각하면 저것이 좋을 것 같은데, 불편한 것은 좀...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 해보고, 선물할 수 있으면 그 때 생각해 봐야겠다.
가끔 빨랫줄에 하얀 광목이 널려 있다. 푹푹 삶아서 원래 하얬어도 훨씬 더 하얘졌을 그 광목, 널려 있는 장면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왜일까... 그리 깨끗한 것이라는 관념이 연합되어있는 것이 아닌데. 아기 기저귀처럼, 아이 생각에 뿌듯해지는 그런 것도 아닐텐데.
그러고 보니 요즘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역시 연세가...
푹푹 삶아서 새 하얘진 광목 개짐... 꼭 그것이어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푹 삶고 잘 개고, 다림질까지 하는 정성, 그리고 그것에 들어가는 노력이 좋아보인다.
월경...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개짐. 이것에는 무언가 많은 것이 쏟아 들여져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중요한 정도가 높다면, 그것과 관련된 행동, 정서도 그만큼 많아져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열마디 말의 내용을 전하고 싶은데 그것을 한마디로 전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한마디 말의 내용을 전하고 싶은데 그것을 열마디로 전하면 듣기 귀찮아진다. 좋은 말은 열마디 말의 내용을 열마디로 전하는 것이다. (갑자기 여기에서 왜 샤논-파노Shannon-Fano의 법칙이 나오지. 경제적인 부호는 물리적 메시지의 길이가 메시지의 정보 내용과 비례할 때 만들어진다
) 아마도 상담 실습 시간에 배운 것도 연결 되는 것 같은데, 정서적인 것과 신념, 행동이 서로 어느 정도 맞아들어갈 때에 건강한 삶이다.
무슨 얘기냐면, 월경이라는 것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힘 들기도 하고, 정서적으로 혼란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배웠다) 복잡하면서 그것이 미치는 신체적/정신적 영향이 큰데, 그것과 관련된 것을 쉽게 처리하고 넘어가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상점에 가서 쉽게 일회용 개짐을 사고, 착용하고, 하던 일로 다시 돌아가고, 벗어서 편리하고 쉽게 정리해서 버리면 끝인 이런 과정은 월경이 미치는 영향과 비교하면 너무 작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월경에 대해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휴가를 며칠씩 받고 많은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그런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광목을 삶고, 널려 있는 새하얀 광목을 보며 느끼는 정결한 느낌, 마음 속의 여유, 이런 것이 월경 동안 느낄 신체적/정서적 영향(혹은 충격, 스트레스)를 다루는 좋은 방법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중언부언 장황하게 이야기 하여 주제가 모호한데, 한마디로 표현하면, 월경이란 것이 하나의 큰일이기 때문에 그 것과 관련된 것도 그만큼 주목을 받아야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그런 이유로 조금 비싸긴 하지만 이런 개짐을 선물로 사주고 싶다는 말이다. (라고 하지만, 한단락을 이렇게 길게 늘여가면서 쓴 것은 글의 요지를 못 잡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생각해 봐야겠다.
(이 글은 아무래도 잘 못 쓴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은, 월경은 중(重)하며 그것과 관련된 것도 중(重)해야하고 신체적/정신적으로 그것과 관련된 대처가 필요하고, 하얀 광목을 삶아 빨고, 널고, 보는 과정은 이런 신체적/정신적 대처가 될 수 있고, 또 그런 것에서 어느 정도 향수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인데...
역시 남자인 내가 다루기엔 조금 어려운 주제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대전 유성구 성북동(예전에는 대전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대전의 일부), 어머니는 충청북도 옥천.
형과 누나가 어렸을 때에는 다른 동네에서도 살았다고 하는데, 나는 대체로 문창동에 살았다. 그리고 바로 옆 동네인 부사동에 살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어렸을 적에 천동, 가양동에 살았던 적이 짧게 있긴하다.
문창동, 부사동, 천동(세 동네가 서로 붙어 있다) 이 동네는 상당히 낯익다. 지금까지의 추억 대부분이 이 곳에 있으니까. 그리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추억이 선명하게 있으니까.
이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때로은 안 좋은 일도 있었을 테고, 서로 모르고 있지만 도움을 준 것도 많을 테고, 아무튼 이들이 여기에 있어 이 시간이 - 혹은, 이 시간에 이들이 여기에 있어 내가 - 행복할 수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또 고마움을 느낀다. 마치 잠시 스쳐가듯이 지난 하루, 그 시간은 살아온 모든 시간에 포함 되는 짧은 시간. 하지만 긴 그 시간보다 더 소중한, 함께 한 시간. 여기 항상 있어왔던 그 많은 사람들과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 전부보다 더 마음을 쓰게 되는 한 사람.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있는 곳에서 추억을 만들고 있겠지.
그리고 앞으로 올 시간. 함께 할 시간. 언제나 시간 속의 존재.
모든 것이 시간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공간 또한 시간에 의존한다. 오직 시간 뿐이지만, 시간은 선택할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것인 지 모른다. 하지만 공간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부여 잡을 수 있지 않던가. 살아가는 이 곳, 그리고 추억이 있는 이 곳, 머리 속에 한번 더 새겨본다.
한강체가 있긴 할 텐데, 어느 CD인지 모르겠다. CD를 DB를 만들긴 해야하는데, 조금 오래된 CD들은 제대로 정리를 안 하고 구워놓아서, 영...
Beatles 노래를 찾았다. 그랬다, Beatles의 노래... 좋아하지. 시작하는 부분만 들어도 어떤 노래인지 기억할 정도로 친숙한, 위안이 되는 목소리, 그 노래.
그리고 기억한다. 충남대 근처에 있는 Yellow Submarine, WAIS님과 함께 가서 Michelle을 들으며 맥주를 마셨던.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고, Beatles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겠지.
그리고 아마도 지금 나와 함께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누구도 혼자가 아닌 것이지.
In My Life
There are places I’ll remember
All my life though some have changed
Some forever not for better
Some have gone and some remain
All these places have their moments
With lovers and friends I still can recall
Some are dead and some are living
In my life I’ve loved them all
But of all these friends and lovers
There is no one compares with you
And these memories lose their meaning
When I think of love as something new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In my life I love you more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In my life I love you more
In my life I love you more
지난 수요일에 쓰려고 했는데, 게으름 피우다보니 오늘 아침에 쓰게 되었다. 충남대 신문사(충대 신문사)에 보냈다. 받아줄 지는 모르겠다. 쓰고 나서 세어보니, 1033자(字). 쓰려고 생각하면서 '딱 1000자만 써야지' 했는데, 막상 분량이 적당히 맞아들어가니 놀랍다. 그렇게 글자 수 세어가며 글쓰기 연습한 적은 없는데...
學問者 亦非異常別件物事也. 학문이라는 것은 또한 이상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다. 격몽요결(擊蒙要訣)에 나오는 말이다. 고등학교 때에 배우고 흐릿하게 기억이 남아있었는데, 다행히 찾을 수 있었다.
원문에는 이렇게 나온다.
人生斯世 非學問 無以爲人 所爲學問者 亦非異常別件物事也. 只是爲父當慈 爲子當孝 爲臣當忠 爲夫婦當別 爲兄弟當友 爲少者當敬長 爲朋友當有信 皆於日用動靜之間 隨事 各得其當而已 非馳心玄妙 希?奇效者也. 但不學之人心地茅塞 識見茫昧 故必須讀書窮理 以明當行之路 然後造詣得正 而踐履得中矣 今人不知學問在於日用 而妄意高遠難行 故推與別人自安暴棄 豈不可哀也哉
사람이 이 세상에 나와 학문하지 않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소위 학문이라는 것은 또한 이상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아버지로서 마땅히 자혜롭고, 자식으로서 마땅히 효도하고, 신하로서 마땅히 충성하고, 부부로서 마땅히 분별이 있고, 형제로서 마땅히 우애가 있고, 어린사람으로서 마땅히 공경하고, 친구로서 마땅히 신의가 있는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을 일상생활에서 일에 따라 각각 마땅함을 얻는 것뿐이다. 현묘한 것에 마음을 대어 기이한 효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원문은 좀 더 있는데, 배운 부분은 이 만틈이다. 이 글을 다시 보니, 배운다는 것이 무엇일지, 배운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쓴 글을 다시 보니, 후회된다. 뭐라고 할까... 너무 건방지게 글을 썼다. 주제 넘게...
학즉불고(學卽不固)를 보고
학즉불고(學卽不固)를 보고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찾아보니, 논어(論語)에 나온다. 不重卽不威 學卽不固. 무게 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학문을 하여도 견고해지지 못한다. 하지만 논어에 나오는 글과 다른 글로 보인다.
고등학교 선생님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학이비루(學而非陋). 학문을 하면 고루해지지 않는다. 학즉불고와 같은 뜻이라는 생각이다. 고(固)가 머리가 굳어지는 것, 고집을 피우는 것, 딱딱한 태도가 되는 것의 여러 가지로 해석되더라도, 아무튼 그것들은 내내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고루(固陋)해지는 것을 말한다.
학문은 이상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 행하는 올바른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하였지만(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이제 학부 밖에 졸업하지 않아 감히 학문이라는 말은 못 쓰겠고, 배움이라는 말을 써보겠다.
무엇이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든, 배움과 고루함, 다시 말해 배움과 태도는 밀접해보인다. 배워서 고루하지 않고 변통하게 되는 것이든, 고루하지 않아 배울 수 있는 것이든 다를 바 없다. 어차피 그런 두 가지가 계속 반복되는 과정일 테니까.
배운다는 것은 스스로 변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워 이전에 알고 있던 것이 바뀌든, 알고 있는 것에 새로운 것을 더하든, 바뀌는 것이다. 바뀌는 것은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고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배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또, 자기가 아는 것을 끊임 없이 돌아봐야 한다.
어느 연세가 많은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때였다. 어느 학생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좀 엉뚱한 의견을 이야기 했다. 다른 학생들의 반응은 웬 헛소리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순(耳順)이 넘어보이는 그 교수님은 그 학생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혹시 좋게 보이려고, 끝까지 듣는 척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실제로 교수님은 진지했다. 역시 오래 학문하신 분이라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 교수님은 그런 모습만으로도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나이에 학문에 대해 글을 쓰고 보니, 부끄럽다.
관리하고 있는 몇몇 서버에 mod_perl을 업데이트했다. 더불어 perl도 업데이트 했다. 역시 신경쓰고 관리하고 그러니 훨씬 낫다.
더불어 테스트를 좀 했다. 과연 성능차이가 많이 날까. 당연 mod_perl, cgi(perl), php의 순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해괴망측한 결과가 나왔다.
| 프로그램 | real | user | system |
|---|---|---|---|
| mod_perl: | 799.32s real | 4.86s user | 7.19s system |
| cgi(perl): | 988.52s real | 4.70s user | 7.18s system |
| php: | 1665.49s real | 7.92s user | 18.39s system |
mod_perl이 php보다 빠른 것은 이해가 되는데, perl로 작성한 cgi가 내장 php보다 빠르다니,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 apache에 cgid를 쓴 것도 아니고, 그냥 cgi 모듈 쓰는데... 어떤 속도의 가속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그래서 조금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테스트가 잘 못 된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대충 수습을 하고 싶다.
그리고 테스트가 잘 못 된 것이라는 결론으로, 테스트 과정도 그냥 묻어 둬야겠다. 하지만, 조금 의심이 된다. 과연 php가 cgi보다 정말 빠를까?
아무튼, 확실한 것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mod_perl이 php보다 빠르다.
조금 더 일꺼리를 찾아서, movable type을 mod_perl에 맞추어 놓을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movable type은 문서를 각각 파일로 저장해 두기 때문에 글을 쓰고, 블로그를 관리할 때가 아니면 프로그램을 이용할 때가 없으니까.
글을 볼 때에도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블로그 시스템과는 좀 다르다. 예를 들면 테터툴즈. 흠, 테터툴즈 과연 속도는 얼마나 될까.
오랜만에 Jef Raskin의 인터뷰인 것 같다.
몇몇 의견은 동의하는데, 몇몇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인터뷰 내용이 좀 부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Jef Raskin을 만나서 할 말이 저리도 없나.
예전의 맥은 단순하고, 가전기기로 생각 되었는데, 지금의 맥은 그렇지 못하다. 이 점은 동의한다. 지금에 와서 맥은 가전기기가 아니고 컴퓨터에 속한다. (이런 분류는 형식적으로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흔히 갖고 있는 개념으로, 컴퓨터는 가전기기의 분류가 아닌 컴퓨터라는 독립적인 분류이다. 다시 말해 컴퓨터는 가전기기라고 할만큼 쉽거나 단순하지 않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맥은 가전기기의 분류에 들어가려고 노력했다.)
하드웨어는 여전히 사용자에게 단순하고 편리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운영체제가 -MacOS 9에서 MacOS 10으로- 바뀌면서 맥의 내부는 너무나도 복잡하게 변했다. MacOS 9에서 System 폴더 내부는 여전히 컴퓨터 초보자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특히 Extensions 폴더는 더욱 그랬지만, 그 부분을 보지 않으면 충분히 단순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지금 MacOS 10을 보고 있으면, 역시 MS Windows 레지스트리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이 부분은 Unix를 취함으로써 얻는 강력함이냐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성이냐의 흥정(trade-off)이고, 어쩔 수 없는, 좋은 선택이었긴 하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있다.
1998년 iMac부터 맥의 디자인은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근래에 나온 iMac G5도 사람들에게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확실히 예쁘다. 헌데, 예쁜 것은 단지 예쁜 것 뿐이다. 예전에, 96학번 조선진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iMac 뒷부분이 예쁘다고 iMac 뒤에 거울을 받쳐 놓고 살 사람은 없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조선진 선배가 얼마전에 그 iMac을 동아리에 기증했을 때에 이런 생각은 확실하다.
예쁜 것으로 오래 살아남기는 힘들 것이다. 가전기기가 아니고, 컴퓨터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전자레인지를 살 때, 빨간 색을 살까 검은 색을 살까 고른 적이 있다. 빨간색을 샀다. 그리고 아직도 만족한다. 빨간색이 음식들과 잘 어울린다. 헌데, 이제와서 빨간색은 단지 빨간색일 뿐이지만, 빨간색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전자레인지를 바꿀 생각은 없다. 어차피 최신의 전자레인지도 음식 데우게 전부니까.
헌데, 컴퓨터는 다르다. 새로운 기종에서는 더 많은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항상 새로운 제품으로 교체할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예쁘다는 이유는 그 제품을 고수할, 그리고 그 제품의 후속 모델을 선택할 가능성을 높이지 못한다.
사용자에게 보이지 않는 컴퓨터, 다시 말해, 운영체제는 사라지고 응용프로그램만이 필요에 따라 적절히 기능하는 상태. 또는 보이기는 하지만 사용자의 의식적인 주의를 끌지 않는 컴퓨터 인터페이스. 이 두 가지가 바로 그가 생각하는 최고인가보다.
역시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곧 "가전기기"의 하나인 맥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전자레인지를 보면 그것의 인터페이스가 들어온다. 음식을 넣는 공간, 그것의 문, 조작하는 버튼. 그것이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많은 주의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만큼 단순하고, 사람이 음식을 데우기 위해 생각하는 것과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합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ATM 장치 앞에서 돈을 찾을 때에, ATM과 관련된 그 내부의 복잡한 장치를 사용자가 볼 필요는 없다. 다만 화면에 적당한 지시를 내리고 입력을 받고 수행을 하면 끝이다. 사용하기 좋은 컴퓨터도 마찬가지가 되어야한다. 컴퓨터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Jef Raskin은 소프트웨어가 비대해져 하드웨어의 대단한 발전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갖는 것 같다.
소프트웨어가 비대해지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일반화", "범용화"에 촛점을 맞춘다면 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까?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과정을, 개발한 프로그램을 일반화하고 그런 것에서 더 창조적으로 될 수 있을텐데, 이런 과정에서 소프트웨어가 비대해졌다면 그것은 꼭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C언어로 Win32 API를 써서 회사 임금 처리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과 Visual Basic으로 만드는 것 간에, 결과물의 성능 차이는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그건을 만드는 과정은 Visual Basic을 사용하는 편이 훨씬 일반적이고 그것을 또 다른 곳에 응용하기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perl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면, 플랫폼(platform)에 독립적인 응용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고, 그 과정은 플랫폼에 의존적인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보다 훨씬 일반적일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은 몇가지 있는데, 졸립다. 그래서 쓸 것이 없다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졸립다. 그래서 자려고 한다.
쓸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보니, 이야기를 길게 할 것 같아서, 졸리움을 핑계 삼는다.
사실 요즘 많이 졸립다. 가을, 아마도 기상 이변일까. 점점 시간이 갈 수록 햇빛을 보는 날의 수가 줄어드는 것 같다. 이번 가을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안개가 너무 많아서 탈이다.
흐린 날은 밖에 나가기에 좋다고 겉으로는 이야기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쳐진 기분이다. 아마도 이렇게 졸린 것은 안개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리운 마음에...
갑자기 장난기 발동. 후다닥 한번 써본다. 이왕이면 하오체로 써볼까?
대략 무효요. 곡선의 몸에 착착 감기는 맛이 일품인 PVC 파이프, 현대 합금 기술의 절정이 만들어낸 골프체를 대략 순위권 밖으로 몰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소. 저 그림은 PVC 파이프와 골프체를 맛 보지 아니한 초딩의 글임에 틀림 없오.
음, dc 폐인도 아닌데 하오체를 쓰니 대략 난감 2 gram. 대충 써야겠다. PVC 파이프는 몇번 맞아봤다. 중학교 1학년 때 사회 선생이 주로 사용했었다. 정말 많은 학생들이 노란 PVC 파이프를 두려워 했다.
골프체는 몸소 체험해 본 적이 없다. 사실 그것으로 맞았다면 정말 죽지 않았을까. 한번은 공업 고등학교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정말 전설로만 듣던 골프체가 있는 것 아닌가. 들리는 말로는 그 견고함이 이를 데 없다고 한다. 비록 욕이 바가지로 나오는 고등학교였지만, 골프체를 보고 인문계 고등학교임에 감사했다.(이 부분은 단지 장난이니 딴지 걸기 없기다.)
또 전설로만 들은 무서운 무기로는, 제일 무서운 각목.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전장(戰場, Field ?)에서 사용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비슷한 것으로 실전에서 자주 이용되는 것이 아무 데에서난 막 굴러 들어온 나무막대기. 괜히 거기에 테이프 감아 손잡이 만들고, 정신일도하사불성(精身一到何事不成)이라는 숭고한 말을 우겨 넣는다.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제일 무섭고, 고통스러운 것은... 몸소 공격하는 것이다. 손, 발을 자유 자제로 놀려 몸으로 전하는 체온과 함께 미움의 감정을 전하면 그것처럼 끔찍하게 아픈 것이 없다. 사실 당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 충격과 고통은 옆에서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음, 그러니까 결론은... 말 잘들으라는 것인가...
만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운동장을 보고 싶어서.
지난 여름 파릇파릇했던 잔듸가 모두 밟혀 벗겨졌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해서 을씨년스럽다고 할까. 게다가 잔듸 보호한다고 쳐 놓은 금지선은 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려 한층 더 했다. 그리고 운동장 한 복판에서 밀려난 구석에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운동장 한켠의 관중석(이전에 스탠드라고 했던 말을 관중석이라고 순화)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친구는 담배를 피웠다. 친구의 담배연기는 조금 쓸쓸했다.
차마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 담배였기 때문에.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쪽에서 아이 둘이 온다. 그리고 정문 쪽으로 지나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아이의 뒷모습...
어렸을 땐, 초등학교 끝나고 집에가면 참 마음이 편했는데. 이젠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면 마음이 바쁘네.
졸업생인 주제에, 어제까지 논문 때문에 정신 없이 바빴던 친구에게 이런 소리를 지껄였다. 그것과는 상관 없이, 친구는 공감했다. 그래, 그 때는 그랬는데.
언제부터인지, 아마도 중학교?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 여유를 잃어/잊어 가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이렇게 어쩌다가, 정말 어쩌다가 친구와 함께 그 때의 여유를 느끼는 것이 지금, 바로 지금의 행복이 아닐까.
조금 지나면, 저런 말도 훨씬 멀어지겠지. 대신 하루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면서 문득 이런 말을 할까. 그래도 대학교 때엔...
상당히 감상적이고, 회고적이다. 과거에 집착한 모습이다. 하지만 어쩌다가 이런 날일 뿐이다.
중학교 때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 수 있어서 좋았다, 고등학교 때엔 매일 22:00이 넘어서 집에 갔지만 열심히 공부했고, 비록 욕이 한 사발씩 튀어 나오자만 그럭저럭 재미있었던 학교 생활이 있었다. 대학에선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것을 스스로 찾으며 헤멜 수 있었다. 그리고 졸업한 지금은 잠시 여유롭게 힘을 기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일을 하고 보람을 느껴야지. 그러면서 준비해야지, 다가 올 시간을. 그러다보면 퇴근하는 시간엔 언제나 즐거움을 느끼겠지.
단지 가끔, 아주 가끔 예전엔 그랬는데라는 생각을 하겠지.
초등학교 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에 이어 "그래, 우리 가끔 하늘을 보자"라는 책이 있었다.
그 때엔 몰랐지만, 정말 제목이 희망적이었다(혹은 그 책을 읽고, 지금 회상하기에 희망적인지 모르지만).
친구의 일기에 이런 말이 있다. 좋은 녀석들. 너희들이 있어서 담배 두개 필꺼 한개만 핀다. ㅎㅎ
충남대학교(CNU)에는 꼬맹(comeng)이라는 공개된 BBS가 있었다. 꼬맹이, 꼬맹이네... 그런 식으로 불렀는데, 이름이 꽤 정감있다. 알고 보니 COMputer ENGineering이라는 뜻이었지만.
아마도 2000년까지는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모르겠다. 2000년에는 몇 번 접속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꼬맹은, 충남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서 운영하던 BBS인데, 상당히 고전적이고, 마치 archie를 사용하는 듯한 느낌에, 계층적인 메뉴와 뚜렷하지 않은 프롬프트(prompt)로 사용이 조금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놀라웠던 것은 채팅 서비스를 talk으로 만들었던 것. 그래서 채팅을 하다가 화면을 지우고 싶으면 엔터키(혹은 리턴키)를 마구마구 눌러야 했다. 하하.
입학하기 전부터 꼬맹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 때에는 꽤 유명했다. 검색을 해보면 공개된 BBS 목록에는 빠지지 않고 나타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입학하여 조금 지나서 접속을 해 봤고, 신기해서 여러 번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조선진 선배의 계정을 빌려 하이텔에서 활동을 했었고(아마 유닉스 동호회 시삽을 하면서 하이텔에 점점 가까이, 꼬맹에서 점점 멀리. ) 그러면서 꼬맹은 점점 잊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1999년 말.
1999년 즈음엔 온라인 서비스 붐이 일었고, 네트워크 보급도 상당히 좋아져서 대부분이 웹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꼬맹도 천천히 시들었나보다.
그리도 그 때엔... 충남대학교 내에 BBS가 몇 개 더 있었는데, 동아리 CPU에서 운영하던 cpu.cnu.ac.kr, 최초 한글 검색 서비스를 자랑했던, 충남대 화공과에서 시작한 korseek(kseek로 바꾸고 근래엔 코비 cobeee.net 서비스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다), 동아리 fatp에서 운영하던 fatp.cnu.ac.kr 등...
그리고 옆에 KAIST에서 아라 ARA라는 서비스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아마도 이건 지금도 있을 것이다. 거기 news group을 이용하니까.
이 때만해도 text 서비스들을 많이 이용했는데... 예를 들면, archie, gopher... www이 모두 잡아 먹었다. 젠장. 그 당시엔 text base의 서비스를 많이 써서 telnet을 많이 이용했는데... 지금은 shell 접속 위해서 ssh를 거의 쓰지만.
아, text mud를 가끔 해서 telnet을 썼던 기억도 있다.. telnet://game.narae.com:4000. 여기도 가본지 오래됐구나.
이렇게 쓰고 보니 무진장 오래된 얘기 같다. 하지만 고작 몇 년 사이. 정말 www이 모두 다 갖고 갔구나.
웹에서 "comeng"과 "꼬맹"으로 검색해보니 신기한 자료가 나온다. 구글이 캐쉬하고 있는 자료 하나
이젠 웹에서도 캐쉬된 자료 밖에 남지 않았나.
그당시 재수하던 성수 선배, 가끔 와서 꼬맹하던 것 기억난다. 그리고 컴퓨터 공학과 선배들도 꼬맹을 가끔 썼던 것도 기억난다. 성수 선배는 4년 재수해서 교대 갔고, 강의실에서 아가씨들 꽃냄새가 난다며 좋아했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리고 영호가 꼬맹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었던가, 그냥 몇번 만났던가 하는 기억도 있고. 뭐하고 있을라나.
충남대 네트워크에 대한 기억들... 이런 것도 있다. 1999년 막 입학 했을 때에는 학교의 domain name이 chungnam.ac.kr이었다. 물론 지금도 쓸 수 있지만. 그리고 조금 지나서 cnu.ac.kr이 충남대로 넘어 왔다. 국립대 중에 영문 표기 이름이 c로 시작하는 학교들이 서로 cnu.ac.kr을 쓰려고 싸웠는데, 합의 하기를 서로 안 쓰기로 했다고 한다. 헌데, 충남대에서 약속을 깨고 cnu.ac.kr 도메인을 갖고 왔다고 한다. 덕분에 충남대는 cnu.ac.kr이라는 멋진 도메인을 갖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는, 충남대의 네트워크는 교육망으로 국가 기간망이 서울대, 카이스트를 거쳐 충남대로 연결되어있다고 한다. 백본(backbone) 망(network)이 있는 탓으로 cnu.ac.kr을 힘으로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라 확실한지 모르겠다.
또 충남대학교의 신기하고 요상한 점. ip를 도대체 얼마나 갖고 있는 지 모르겠다. 168.188.*.* 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도저히 불가능한 의심을 해본다.
충격... 방금 apnic에 검색으로 해본 결과, 168.188.*.*을 갖고 있다. 역시 초기에 등록한 것이라 ip 부족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왕창 주었나보다. 그리고 욕심 내어서 왕창 받아왔나보다. 대전에 있는 다른 대학교, 예를 들면, 한밭대, 대전대 등을 보면 ip가 부족해서 사설 ip 쓰고 그런다던데.
그리고 충남대학교 네트워크는 제약이 없다. 막힌 port가 있다던지, 방화벽이 있어 외부에서 접속을 못한다던지 하는 것이 없어 충남대학교 내에는 서버가 엄청나게 많다.
2001년도에 MS의 IIS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잘 기억이 안나는데, 아마도 worm blast... 뭐 였던 것 같다)가 판쳤을 때, 동아리에 빌붙어 돌리던 kouf.org 서버에 apache 로그가 몇시간에 1GB정도 되었다. 학교 내의 모든 서버가 접속을 시도하니까 로그가 마구 쌓였던 것이다.
아마도 충남대학교에 방치된 서버들을 외국의 크래커들이 중간 경유지로 많이 썼을 것이다. 심각할 정도로.
어떤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 지금 나와있는 저장 매체, 예를 들면, DAT, CD, MO, DVD, HDD 그외... 이런 것들은 안정성이 떨어지고, 가장 멋진 방법은 자료를 네트워크 상에 올리고 계속해서 그것을 복제하고 삭제하는 방법이 자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그런 방법을 적극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또 기억을 네트워크로 밀어 넣는다.
가능하면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을 쓰려고 하는데, 요즘 상상을 바탕으로 한 것을 여러번 썼다. 상상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글에 완전히 허구적인 것을 쓰게 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이런 글. 쓰고 나서 보니 마치 생생한 경험인양 써 놓았다. 솔직하게, 진짜 경험만을, 그리고 진짜 경험에서 나온 생각을 쓰려고 작정했던 것이 조금 흐려졌나보다. 상상력을 좀 많이 더한 글인데, 허구는 아니어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글이 이런 글. 이런 글까지는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데, 위에 두 글의 경우처럼 허구를 쓰는 것은 조심해야겠다.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들었냐면, 잠을 깨어 눈을 떴는데, 갑자기 "나이 90에 20대를 돌아보며"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싶어서이다. 물론 지금은 20대이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쓸 수 없다. 하지만 90세라고 상상을 하고 지금을 한번 평가해보고 싶다.
친구가 휴학을 한다고 한다. 믿음직한 친구인데, 여러가지로 힘든가보다. 의류학과 경영학을 복수전공으로 공부하고 있고, 4학년 2학기여서 졸업 준비하느라 힘들테고, 그리고 아마도 이성친구 문제도...
친구에게 말해 주고 싶다. "생각하건데, 네 나이 90에 20을 돌아보면, 후회하지 않을거야."
쓸까, 말까. 쓴다면, 의도했던 것과는 반대되게, 완전히 허구의 글을 쓸텐데.
상상하는 행위도 경험이기는 하지만, 상상한 내용은 경험일 수 없다. 만약 상상한 것을 쓸 때엔 상상이라고 단서를 붙여주면 될까?
상상한 내용과 현실의 경험의 내용의 차이는 뭘까? 혼란스럽다.
지금 듣고 싶은/있는 노래, 김민기의 봉우리. 친구도 듣고 있으면 좋겠다. 차분한 목소리가 위안을 주는데...
친구가 이승철 7집을 주며 말 했다, "노래가 모두 좋다."
아쉽다.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경험을 통한 진정한 위로 한마디 할 수 없으니.
아마 이 이름이 맞을 것이다. "특별 어학 학점 취득 시험" 5년 전 이야기이니... 아마도 지금도 신입생 대상으로 하고 있을텐데 확인해 보기 귀찮다.
충남대학교, 입학 했을 때 신입생들이 남는 시간에 공부해서 어학과 관련된 학점을 미리 취득할 수 있다고 편지가 왔다. 아마도 입학 등록금 고지서와 함께 온 것 같다.
과목을 보니 영어 독해, 영어 작문, 그리고 다른 외국어... 수능 끝나고 남는 시간이 거의 3달에 가까웠던 터라 뭔가 하고 싶었는데, 그 때 마침 영어 작문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문법에 맞지도 않는 표현을 써가며 번역도 해보고 그랬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신청 했다. 영어 작문.
그 시험 봤던 때가 기억난다. 아마도 법대에서 봤던 것 같다. 어느 강의실에서 시험을 보는데, 강의실 안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영어 독해를 봤고, 나와 내 뒤에 앉은 사람만 영어 작문을 봤다. 그 때 어찌나 긴장되던지...
시험 못 봐도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안심해도 됐을텐데, 괜히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이라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안았던 때니까. 아마도 1999년 2월 언제쯤. 그 때의 느낌이 기억난다. 꽤 따뜻한 강의실이었고, 바깥 날씨는 추었고, 긴장했고, 사람들이 많았고,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친척이라는 영문과 교수, 이름이 황봉주라고 하셨던가, 그 분이 내 답안지 채점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했다.
문제가 꽤 어려웠다. 간단한 문장들을 영어로 작문하는 것이었는데, 역시 실력 부족. 그리고 문법과 관련된 문제가 여러개 나왔다. 괄호 안에 in, out, of, on ... 그런 전치사 넣는 문제들도 뒷부분에 꽤 있었고. 맨 마지막 문제는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서술하라는 것이었다. 뭐 간단하게 심리학 공부하고 싶고, 컴퓨터도 관심이 있어서 컴퓨터와 관련된 활동 하고 싶다고 썼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채점하는 사람이 '이 실력으로 왜 시험을 봤을까?'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받은 학점이 B0.
대신 성적증명서를 보면 친구들보다 한 항목이 더 있어서 눈길을 끈다. 친구들이 뭐 대단한 것인 줄로 생각한다.
그리고 친구들보다 미리 3학점 따고 들어가서 1학년 2학기에 15학점만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사실 1학년 때부터 24학점씩 들었다면 좋았을텐데. 살기는 힘들었겠지만.
성적증명서를 보고 있자니 그 생각이 났다.
살면서, 얼마 살진 않았지만, 막연히 불안한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엔 생각을 한다.
혹은... 사람을 만난다. 글을 읽는다. 술을 마신다. 노래를 듣는다...
혹은... 떠난다. 여행을 간다. 휴식을 한다...
그러면서 새롭게 보려고 노력한다.
곰곰히 생각해본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은 무엇일까,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왜...
하늘을 보고 눈물을 흘려보고, 잊혀질 때까지 걸어보고, 즐거워 보이는 것에 마음을 뺏겨보고...
잘 살아야겠다는, 잘 살아야한다는 집착으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중압감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리고 고민을 해보고, 답에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밝은 날이 찾아와 한참 잊고 있다가, 또 고민을 하는 날이 온다. 그러기를 끊임없이...
그냥 많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술 한잔 권하는 친구 있으면...
김민기 작사인 탓인가. 가사가 잘 짜여져 있다.
삶에 대한 명상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겠지
공허의 바다에 흩어지겠지
사는동안 두려워 말아야 해
언젠가는 어디서든 남겨지진 않으니
고뇌의 가지는 더 커져만가고
방황의 끝은 어디로
우리는 어디서 오는걸까
모두 어디로 향한걸까
무엇을 위해서 느낀걸까
사랑을 진실을 영혼을 그 모든걸
하늘을 보면은 알게되겠지
눈물을 흘리면 느껴지겠지
오랫동안 지나온 내 발자국
나 역시도 언젠간 또 지워지게 되겠지
고뇌의 가지는 더 커져만가고
방황의 끝은 어디로
우리는 어디서 오는걸까
모두 어디로 향한걸까
무엇을 위해서 느낀걸까
사랑을 진실을 영혼을 그 모든걸
네티즌(netizen)이라는 말이 있다. 언론매체에서 아무 생각 없이 네트워크 사용자 일반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여 충분히 왜곡되어 알려져 있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네트워크 사용자 중, 다분히 정치화 될 수 있는, 정신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네티즌은 네트워크 쓰레기(한국에서 쓰는 속어를 쓰자면, 찌질이, 초딩)까지 포함할만큼 쉽고 단순한 말이 아니다.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사회에, 집단에 긍적적으로 관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성(聖)스러운 말이기까지 하다.
이런 글을 보고 있으면, 그러면서 필자의 생각을 곰곰히 따지고 있자면, 네티즌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네이버 블로그에 대한 말이 많다. 불평하는 소리 중에 네이버 블로그 사용자들도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네이버에 대한 긍정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네이버를 아끼는 마음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이버 사용자 중, 네이버에 대한 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왜 그들은 여전히 네이버를 사용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와 그들"로 나누어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네이버에 비난이 아닌 창조적인 비판을 하는 사람은, 네이버-우리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단지 비난을 하는 사람은 네이버를 그들로 볼 것이다. 네이버-우리에 속하는 사람은 네이버에 애정을 갖고 있으며 네이버가(우리가) 긍정적으로 변화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네이버를 그들로 보는 사람은 네이버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자기 집단에 대한 애착은 (애착이라는 말보다 좋은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마침 찾아볼 사회 심리학 책이 없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네이버-우리에 속하는 사람들의 창조적인 비판이 네이버에 수용될 때에 네이버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한다. 많은 사용자가 네이버를 우리로 생각하고 있으면 네이버는 그들이 하고 싶은 바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용자들의 요구를 수용해야한다. 그것이 사용자에 대한 신의를 보이는 것이다. 과연 네이버는 이러한 의견에 귀 기울이고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저번에 있었던 네이버 블로그 사용자 접속 차단 문제를 보면, 사용자의 글을 일일이 읽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이 이런 글을 보고 자기네 서비스의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만 해본다.
네이버 사용자들의 비판적인 글을 찾아보면서, 그런 것들을 한데 모으고 종합하여 네이버 측에 공식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글 하나에 트랙백이라도 모아서 네이버에 읽어보라고 요청을 하는 정도에서 시작해서, 네이버의 변화를 요구하는 글을 단체로 게시한다던지...
(쓰면서 생각해보니, 사용자들 게시물이 온통 네이버 변화 촉구의 글로 가득 찬다면 참 가관이겠다.)
네이버 블로그를 사용하진 않지만, 네이버 블로그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리고 블로그 서비스의 상업화에 대한 비난의 글이 많은데, 그 점에 대해서는 조심해야할 것 같다. 특히 블로그의 상업화 자체를 이유로 -상업화 내용이 아니라- 비난하는 글이 있는데 이는 잘 못 됐다고 생각한다.
사업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던가. 무료 서비스로 지금까지 잘 이용했고, 이제 기반을 잡았으니 수익을 올리는 것이 사업체의 생리다.
사실 대형 업체들의 블로그 서비를 보면서 놀랐던 것이 광고가 대단히 적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블로그 서비스에 광고도 거의 없이 잘 썼다면 이제 상업화 된 서비스를 이용하여 수익을 좀 내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글을 보면서, 몇몇 글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 bekrage에 계정 주고 설치형 블로그를 사용하라고 하거나, bekrage에 다수를 위한 블로그 서비스를 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은진님도 bekrage에서 blog서비스를 해보고 싶다고 했었고, 현재 서버 자원은 남아 돌고, 트래픽은 계약한 것보다 턱없이 적으니까.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겠다. 의견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고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질테니까.
Jungian은 아니지만, Carl Gustav Jung에 관심이 많다. 어찌된 일인지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제대로된 Jung의 서적을 읽어본 적이 없다. 항상 정신분석학파로 싸잡아 정리된 내용만 배운 탓일까. 그나마 Alfred Adler는 상담, 심리치료에서 조금 중요하게 다루는데, Jung은 접할 기회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Sigmund Freud의 전집에 손을 대면서 Jung의 서적도 조금 살폈던 것이 기억난다. 다만 Jung이 종교 같은 것에도 관심을 두어서 별로 보고 싶지 않